정치인의 언론관은 말이 아니라 태도에서 드러난다. 기자회견장에서의 표정, 질문을 대하는 호흡, 비판 앞에서 선택하는 단어 하나가 그 사람의 언론관을 말해준다. 그래서 언론관은 선언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권력과 마주한 순간마다 반복되는 반응의 축적일 뿐이다.
이재명 대통령의 언론관은 분명하다. 그는 언론을 중립적 전달자라기보다 정치적 행위자로 인식해왔다. 언론은 현실을 그대로 옮기는 창이 아니라, 의도를 가진 프레임의 생산자라는 인식이다. 이 판단의 출발점 자체가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한국 언론은 오랜 시간 권력과 자본, 이념과 결합해 왔고 그 과정에서 공정성에 대한 의문을 반복적으로 받아왔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언론을 정치 행위자로 인식하는 순간, 권력은 언론을 설득의 대상이 아니라 대응의 대상으로 보기 쉽다.
이재명 대통령의 언어에서 자주 등장하는 '왜곡', '공격', '프레임'이라는 단어들은 이 같은 인식 구조를 분명히 보여준다. 그에게 언론의 질문은 정책 검증의 과정이기보다 정치적 공세의 연장선에 놓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질문의 내용보다 질문의 의도를 먼저 해석하게 되고, 설명보다는 반박이 앞선다. 언론은 공론의 장이 아니라 싸워야 할 전장으로 이동한다. 이 지점에서 이재명 대통령의 언론관에는 한 가지 중요한 요소가 빠져 있다. 두려움이다. 두려움은 약함이 아니다. 민주주의에서 두려움은 권력이 스스로를 시민 앞에 세우는 태도다. 언론이 나를 평가할 수 있다는 인정, 그 평가가 정당할 수도 있다는 겸허함이 두려움이라는 말 속에 담겨 있다. 그러나 이재명 대통령의 언론관에서 이 두려움은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다. 그에게 언론은 견뎌야 할 존재이고, 돌파해야 할 프레임이며, 필요하다면 정면으로 맞서야 할 상대다. 이 인식 속에서 권력은 쉽게 자기 확신의 공간으로 들어간다.김대중 전 대통령은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언론으로부터 가장 가혹한 평가를 받은 인물 중 하나였다. 왜곡도, 오보도, 적대적 프레임도 숱하게 겪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언론을 적으로 규정하지 않았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언론이 나를 비판할수록, 나는 더 설명하고 더 설득해야 한다." 이 말은 미사여구가 아니다. 언론을 이겨야 할 상대가 아니라 설득해야 할 공론의 장으로 본 인식이다. 비판을 반박으로 돌려 세우기보다 설명으로 흡수하려는 태도였다. 이재명 대통령은 설득보다 반박에 능하고, 설명보다 대응에 익숙한 정치인이다. 이는 그의 정치적 성장 과정과 무관하지 않다. 끊임없는 공격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현실이 그의 언론관을 투쟁적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대통령의 언론관은 야당 정치인의 언론관과 달라야 한다. 권력의 언어는 더 느려야 하고, 더 많은 설명을 품어야 하며, 더 큰 침묵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언론을 정치 행위자로만 인식하는 순간, 권력은 언제든 '언론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논리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 논리는 종종 압박과 배제, 제도적 통제로 이어진다. 언론의 자유는 언론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권력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필요하다.
이재명 대통령의 언론관은 강하다. 그러나 강함은 언제나 위험과 함께 온다. 두려움을 잃은 권력은 자기 확신에 갇히기 쉽고, 자기 확신에 갇힌 권력은 설명을 줄이고 대응을 늘린다. 정치는 결국 기록으로 남는다. 그 기록의 문을 여는 열쇠가 언론이라면, 그 문 앞에서 잠시 멈출 줄 아는 태도야말로 권력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겸손이다. 언론과 싸워 이긴 권력은 없다. 언론을 설득하지 못한 권력은 시간 앞에서 반드시 흔들린다. 이재명 대통령의 언론관이 지금보다 한 걸음만 더 두려움 쪽으로 이동한다면, 그의 정치는 더 오래 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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