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수의 절차탁마] '인공지능'은 있어도 '인공지성'은 없다

  • AI 시대의 노동, 몸, 그리고 덕

[이두수 작가]
[이두수 작가]



AI와 로봇이 일자리를 잠식할 것이라는 예견은 새롭지 않다. 그러나 이 기술적 변화 앞에서 인간이 어떻게 변할 것인가에 대해선 아직 말이 갈린다. 유발 하라리는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서, 데이터와 알고리즘이 인간의 많은 기능을 대신하게 되겠지만, 인간은 여전히 유한한 몸과 감각을 가진 존재로 남을 것이라고 말한다. 종교의 영향력은 약해지고, 슈퍼리치와 기술 격차는 새로운 “종 구분”에 가까운 계층을 만들어낼지도 모른다. 이 거대한 전망의 마지막에서 그가 꺼내든 해법은 의외로 소박하다. 생각을 멈추고, 잠시 호흡에 머무르며, 자기 마음을 관찰하는 명상이다.

이 대목에서 자연스레 떠오르는 것이 ‘몸’이다. 명상은 머릿속 추상적 사유가 아니라, 숨 쉬고 있는 지금 이 몸으로 돌아가는 연습이다. 몸에 대한 관심이야말로, 건설 현장에서 공구를 들고 골조를 오르내리며 날마다 체감해 온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노동하는 자만이 몸의 중요성을 더 깊게 안다고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육체노동자는 '오늘의 몸 상태'에 대해 거짓말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인다. 무거운 자재를 들다 삐끗한 허리, 하루 종일 쪼그려 앉아 생긴 무릎의 묵직함, 콘크리트 양생 속도를 가늠하는 손가락의 감각. 이런 계산은 엑셀도, 챗봇도 대신할 수 없다.

반대로, 현대인은 몸으로 느끼는 시간보다 화면을 바라보는 시간이 훨씬 많아졌다. 스마트폰과 플랫폼 알고리즘은 사람의 주의를 붙잡기 위해 치밀하게 설계되어 있고, 짧은 영상과 무한 스크롤은 사용자의 신체 감각을 마비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알고리즘은 사용자의 취향을 학습하는 듯 보이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사용자가 알고리즘의 리듬에 맞춰 움직이게 된다. 이때 육체노동은 오히려 인간다운 삶의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 있다. 몸을 쓰는 노동은 화면에서 떨어져 나온 시간 속에서 다시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는 감각을 회복하게 한다. 어쩌면 머리로 관념과 개념을 다루는 지식인은 AI로 빠르게 대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몸의 경험으로 익혀 온 성품과 노동의 감각은 쉽게 AI로 대체하지 못할 것이다.

인공지능의 시대를 살면서 자주 떠올리는 질문이 있다. AI의 인텔리전스(Intelligence)를 한국어로 옮길 때, 우리는 왜 여전히 ‘지능’이라고 부를까. 왜 ‘인공지성’이 아니라 ‘인공지능’일까. 이것은 단순한 번역의 습관이 아니라, 인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대비는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과 인간의 지성(intellect)이다. 지능은 주어진 문제를 잘 풀고, 많이 기억하고, 빠르게 계산하는 능력이라면, 지성은 그 능력을 어디에, 어떻게 쓸 것인가를 묻는 성품에 가깝다. 말하자면 “얼마나 많이 아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 어떻게 판단하고 선택하는가”의 문제다.

디스커션(discussion)도 마찬가지다. 누구의 말이 더 논리적인가를 겨루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더 옳은가를 함께 찾아가는 과정을 지향하는 토론은 지능이 아니라 지성의 영역이다. AI가 정보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일을 맡을수록, 인간은 오히려 이런 지성의 자리를 더 분명히 요구받는다. 디지털 시대의 토론 역시 비슷한 기로에 서 있다. 소셜미디어와 댓글 창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논의(discussion)’는 사실 누가 옳은가를 결정하는 싸움으로 흐르기 십상이다. 그러나 제대로 된 토론은 “누가 옳으냐”를 겨루는 싸움이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를 함께 결정하는 과정에 가깝다. 지능이 상대를 이기기 위한 논리를 쌓는 능력이라면, 지성은 한 박자 늦춰 “정말 이게 더 나은 답인가”를 되묻는 힘이다.

논의(論議)의 한자 ‘議’는 言과 義의 합성어다. 義의 기원을 풀어내는 설명 가운데 하나는,  양(羊) 머리를 창(戈)에 꽂아 하늘에 바치며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묻는 형상을 그린 글자라는 것이다. 위에서 내려오는 ‘정답’을 받아 적는 톱다운 방식처럼 보이지만, 실은 더 큰 질서 앞에서 자기 이익을 잠시 내려놓는 행위를 가리킨다. 지성은 머리의 영리함이 아니라, 이 질문 앞에서 자신을 낮출 줄 아는 태도와 이어져 있다.

종교 전통도, 인간의 모순을 지성의 문제와 연결해 설명해 왔다. 전통적 기독교 신학에서 타락(Fall)은, 인간이 하느님을 떠난 결과로 죄와 죽음, 고통뿐 아니라 ‘지성의 어두워짐’을 겪게 되었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타락으로 인해 “지성이 흐려지고, 무지와 혼란에 빠졌다”고 말하는 것이다. 즉, 옳은 것을 아는 능력 자체가 손상되었거나 왜곡되었다는 진단이다.

불교에서 무명(無明, avidyā)은 단순한 지식 부족이 아니라, 현실을 잘못 보는 근본적인 ‘착각’이나 ‘오인’을 가리킨다. 사성제, 연기, 무상·무아 같은 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 상태, 즉 세계와 자기에 대한 인식 자체가 뒤틀려 있는 상태가 무명이다. 이 무명이 번뇌와 업, 괴로움의 사슬을 돌리는 최초의 고리로 제시된다.

두 전통 모두 인간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존재”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지적 차원, 곧 intellect의 결함을 언급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가리키는 것은 단순한 공부 부족이 아니라 존재와 관계, 세계 전체를 보는 눈이 구조적으로 어긋나 있다는 진단에 더 가깝다. 그래서 이를 현대적 언어로 묶어 말하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인식의 왜곡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며, 종교란 그 왜곡을 직면하고 바로잡으려는 각각의 시도”라고 정리할 수 있다. 이때 intellect는 정보 처리 능력이라기보다는 세계와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에 대한 지성의 방향과 깊이에 대한 내용이 된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덕’이라는 동아시아의 오래된 개념이 떠오른다. 한자 德(덕)을 파자해서 彳(걸음·행동), 直(곧음), 心(마음)으로 보아, 곧은 마음이 올곧은 길로 드러난 상태를 가리킨다고 풀이하기도 한다. 어떤 해석은 彳을 두 사람의 걸음으로, 直 안의 십자를 하나됨의 상징으로, 目을 사위를 보는 눈으로 읽어, 덕을 “몸과 마음이 하나 되어 타자와 조화를 이루려는 마음”으로 풀어낸다. 문자학의 정설이라기보다, 덕을 관계적 존재론 속에서 다시 읽어낸 창의적 해석이다.

그러므로 덕은 고정된 성격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배우고 조화를 익히려는 지속적인 노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 타산지석과 반면교사라는 말은 바로 이 지점을 가리킨다. 남의 흠결을 들어 그 사람을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남의 흠결 속에서 나의 부족함을 비추어 보고, 공은 계승하고 과는 경계함으로써 자기 덕을 키우는 태도다. 어느 시대의 위인이나 예술가에게도 흠결이 없지는 않다. 문제는 그 흠결이 드러났을 때, 그 사람의 존재 전체와 공헌을 통째로 없애는 방향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공과 과를 분리하여 더 깊이 이해하는 계기로 삼을 것인가이다.

요즘 미당 서정주 논쟁은 이런 점에서 한국 사회의 현재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는 한국 현대시의 형식과 언어를 비약적으로 끌어올린 국민적 시인이면서도, 일제 말기 친일 작품과 해방 이후 군부 권력에 대한 협력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다. 교과서에서 그의 작품을 통째로 삭제하는 흐름은, 친일을 단죄하려는 의지일 수 있지만 동시에 복잡한 역사와 모순을 피하고 싶은 사회의 편의주의일 수도 있다. 친일 행적을 분명히 비판하면서도 문학사적 공헌을 함께 가르치고, 학생들이 스스로 공과를 토론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덕을 키우는 교육일 것이다. 완전한 친일청산과 적폐청산을 주창하는 사람들은 과연 자신들의 과는 없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는 “새로운 사람(New Man)”을 이야기한다. 그가 말하는 새로운 사람은 남보다 뛰어난 초인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의미를 스스로 묻고, 과거의 폭력과 오류를 외면하지 않으며, 더 나은 인간이 되려는 방향으로 조금씩 움직이는 사람이다. 덕을 “나다움이 성숙해 가는 힘”으로 볼 때, 새로운 사람은 곧 자기 덕을 키워가는 사람, 어제의 자신보다 조금 더 인간다운 자신을 향해 걸어가려는 사람이다.

2026년 새해를 시작하며 나는 올 한 해를 “새희망 새출발”의 해로 삼고자 이 말을 올해의 표어로 정했다. 그리고 첫 그림 전시회 제목을 “노동이 사람을 만든다”로 정해 1월에 진행했다. 이것은 AI 시대의 노동자이자 국제구호 시민활동가로서, 새로운 사람으로 살겠다는 자기 선언이다. 인공지능이 지능을 대신할 수는 있어도, 몸으로 세계를 느끼고, 타산지석과 반면교사를 통해 덕을 키우고, 과거의 모순과 마주하며 더 나은 사람을 향해 나아가려는 지성까지 대신해 주지는 못한다.

공구를 들고 현장에 서는 몸,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며 세계를 해석하려는 손, AI를 도구로 쓰되 그 지능의 방향을 끊임없이 질문하는 마음. 이 세 가지가 함께 갈 때, 노동과 지성, 덕과 새로운 사람이라는 오래된 말들은, 혼돈과 갈등에 묻힌 오늘의 일상 속에서 다시 현재형이 될 것이다.

AI가 다 해 줄 수 있다고 인간이 자기 계발 노력을 멈춘다면, 즉 덕을 쌓지 않으면 인간으로서 자기 존립 기반을 잃을 수 있다. 덕은 자기 가치를 높이고 키우려는 자기 노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덕을 쌓기 위해서는 우선 욕망이 필요하다. 자기 삶의 부가가치를 높이고 싶은 야망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새로움에 대한 호기심이 있어야 한다. 뭔가 더 알려고 하는 호기심은 도전을 낳고, 도전은 경쟁이며 모험이고, 싸워 이기는 과정이다. 면역력을 높인다고 하는 것은 바로 새로운 환경을 접했을 때 싸워 이기는 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힘을 기르는 일이다. 무균실의 환경에서는 면역력도, 창의성도 만들어질 수 없다.
인간의 삶은 결국 기억과 기록이다. 몸으로 겪은 일을 기억하고, 머리로 그 기억을 기록하며 되짚어 보는 과정 속에서 지성은 자란다. 지성이란 타고난 머리의 좋고 나쁨이 아니라, 몸에 새겨진 경험을 언어와 이미지로 가다듬어, 삶의 방향과 의미를 길어 올리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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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석은 벽에 상처를 남기는 것이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살을 떼어내고 때로는 뼈를 자를 수도 있어야 한다. 그림/ 이두수 작가]


필자 주요 이력 
idoosoo@naver.com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며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왔다. 현재는 아프리카아시아난민교육후원회에서 빈곤지역 교육지원사업에 관여하고 있다. 건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해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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