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근거 없는 숫자, 반복되는 공포…대한상의 보고서의 민낯

요 며칠 사이 상속세를 둘러싼 소동은 대한상공회의소가 정책 논쟁에서 검증되지 않은 숫자를 근거로 현행 제도 전반에 결함이 있는 것처럼 해석을 이끌어온 방식이 여전히 반복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고액 자산가 2400명 탈한국’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자 상속세 제도의 실제 구조나 작동 방식보다, 이 숫자가 암시하는 정책의 성패 여부가 먼저 논쟁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수치의 출처와 정의, 해석의 한계가 충분히 검증되기도 전에 숫자 자체가 정책 평가의 기준처럼 소비됐다.

대한상의 보고서는 이 수치를 통해 상속세가 고액 자산가의 해외 이탈을 촉발하고 있다는 해석으로 논의를 확장했다. 그러나 논란이 커지자 국세청장은 해외 이주 신고와 자산 신고라는 실제 행정 데이터를 근거로 해당 수치가 사실과 다르다고 공개적으로 반박했다. 국세청이 파악한 최근 수년간 해외 이주자 가운데 자산 10억원 이상 고액 자산가(부동산 제외)는 연평균 139명 수준이며, 상속세가 없는 국가로 이동하는 고액 자산가 비중이 뚜렷하게 높아졌다고 보기도 어렵다는 설명이었다. 대통령을 비롯해 경제부총리, 산업통상부 장관도 대한상의가 신뢰할 수 없는 자료를 근거로 내세웠다며 반박에 나섰다.

이 반박은 숫자 하나의 진위를 넘어, 대한상의 보고서가 숫자를 해석하는 방식 자체에 의문을 제기했다. 행정 데이터로 확인되지 않은 추정치를 근거로 현행 상속세 제도가 부당한 것처럼 인식하게 만드는 해석이 정책 논의를 한쪽으로 몰아갔다는 지적이다. 제도의 실효세율이나 공제 구조, 가업 승계 과정의 부담을 점검하는 논의보다 “이런 숫자가 나온다면 제도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결론이 먼저 소비되면서 상속세 논의의 출발점 자체가 왜곡됐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이런 장면이 낯설지 않은 이유는 대한상의가 과거에도 비슷한 방식으로 정책 논쟁에 개입해왔기 때문이다. 법인세 인상 논의가 불거질 때마다 대한상의는 기업 투자가 급감하고 해외 이전이 가속화될 것이라는 경고를 숫자와 함께 내놓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실제 투자 지표를 보면, 법인세율 변화보다 글로벌 경기, 금리 환경, 산업 구조 변화가 훨씬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럼에도 당시의 숫자들은 강한 인상을 남겼고, 정책 논의는 한동안 ‘세금 인상=기업 탈출’이라는 단순한 구도로 굳어졌다.

최저임금 인상 국면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수십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라는 전망이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그 수치들은 가능성을 전제로 한 시나리오였지만, 어느 순간 확정된 결과처럼 소비됐다. 실제 고용 시장은 업종과 연령, 경기 흐름에 따라 훨씬 복합적으로 움직였다. 취업자가 늘어난 시기도 있었고 줄어든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숫자는 늘 한 방향으로만 해석됐다. 정책 변화는 곧바로 붕괴로 이어진다는 메시지가 고정됐다.

주 52시간제 도입 당시에도 근로시간이 줄면 생산성이 급락하고 GDP가 수십조 원 감소할 것이라는 경고가 쏟아졌다. 자동화, 공정 개선, 업종별 적응 가능성 같은 변수들은 부차적인 요소로 밀려났다. 시간이 지나 한국 경제가 그 경고대로 무너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확인됐지만, 당시의 숫자들이 만들어낸 불안과 갈등은 오래 남았다. 숫자는 사라졌지만 불신은 축적됐다.

이렇게 보면 이번 상속세 논란은 우연한 사고라기보다 오랫동안 반복돼온 방식의 연장선에 가깝다. 정책 변화가 논의될 때마다 최악의 시나리오가 숫자의 형태로 제시되고, 그 숫자는 충분한 설명 없이 공포의 언어로 번역된다. 정책의 복잡성은 사라지고 ‘이대로 가면 끝난다’는 메시지만 남는다. 숫자가 정책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정책을 몰아붙이는 도구로 사용되는 순간이다.

문제는 이런 방식이 정책 논의를 빈곤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상속세 논의는 실효세율의 수준, 공제 체계의 정합성, 가업 승계 과정의 현실적 어려움, 연부연납 제도의 실효성 같은 구체적인 질문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러나 ‘부자들이 떠난다’는 경고가 먼저 나오면 논의는 곧바로 흑백 대결로 전환된다. 줄이느냐, 버티느냐의 싸움만 남고 제도 개선의 디테일은 설 자리를 잃는다.

불필요한 시장 불안도 무시하기 어렵다. ‘탈한국’이라는 표현은 그 자체로 강력한 신호다. 일부는 그 신호에 과잉 반응하고, 과잉 반응은 실제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만들어진 움직임은 다시 “봐라, 우리가 말하지 않았느냐”는 증거로 소비된다. 숫자가 현실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밀어내는 자기실현적 예언으로 작동하는 구조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책임의 공백이다. 대한상의는 법적 지위를 가진 경제단체로, 발언 하나가 정책과 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그럼에도 보고서의 오류가 드러났을 때 책임지는 방식은 늘 모호하다. 이번과 같이 검증 부족을 인정하는 사과로 일단락되면, 그 사이 발생한 사회적 비용은 누구도 계산하지 않는다. 숫자는 휘발성으로 소비되고 불신만 쌓인다.

대한상의가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조직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 역할 자체를 문제 삼을 이유는 없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 엄격한 기준이 요구된다.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이 사용하는 데이터일수록 출처와 정의, 해석의 한계가 더 명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데이터는 공공의 언어가 아니라 집단 이익을 관철하는 무기가 된다. 이번 상속세 논란이 불편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숫자가 정책을 설명하기보다 정책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쓰였다는 인식이 남았기 때문이다.

이번 일을 단순한 실수로 넘긴다면 다음 정책 국면에서도 같은 장면은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또 다른 숫자가 등장하고, 또 다른 ‘탈출’과 ‘붕괴’가 경고될 것이다. 그때마다 공론장은 흔들리고 정책 논의는 다시 오염될 것이다. 숫자에 대한 신뢰는 더 약해질 수밖에 없다.

상속세를 둘러싼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그 논쟁이 생산적으로 이어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더 센 경고가 아니라 더 정직한 데이터다. 정책에 반대할 자유는 있지만, 데이터를 마음대로 해석할 자유까지 허용되지는 않는다. 대한상의가 이번 사태를 계기로 보고서의 언어와 책임을 바꾸지 않는다면 ‘대한상의식 숫자 장사’라는 비판은 앞으로도 반복될 수밖에 없다.

숫자가 정책 논의의 출발점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다음 정책 국면에서도 또 다른 ‘소동’을 지켜보게 될 것이다.

전운 경제부 부국장
전운 경제부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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