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우 전 국회의원]
2025년 7월 22일 상법 이사충실의무 개정으로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이 회사뿐만 아니라 주주까지로 확장되었다. 이 개정은 지배주주의 승계나 지배력 유지를 위해 분할·합병·자본거래가 설계되고, 그 과정에서 일반주주의 이익이 구조적으로 누락되는 문제를 '이사 의사결정' 단계에서 제어하는 디딤돌이라 평가받는다. 그러나 법 개정만으로 곧바로 실효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충실의무 위반 여부는 '결과'만으로 판단되기 어렵고 '절차'와 '정보'의 축적을 통해 검증되어야 한다. 상법 개정 이후 "이사가 의무를 제대로 지켰는지 확인하려면 공시제도를 개선해 주주에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충실의무 개정의 성패는 "이사회가 무엇을 어떻게 검토했는지 주주가 알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특히 저평가 기업을 둘러싼 진지한 인수 제안, 이른바 '곰의 포옹(Bear Hug)' 상황에서 이사회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가 중요하다.
최근 진행된 넷플릭스(Netflix)의 워너 브라더스 디스커버리(WBD) 인수 제안과 이에 대항하는 파라마운트-스카이댄스(PSKY)의 적대적 공세 사례는 이사회가 주주 가치 극대화를 위해 어떻게 충실의무를 이행하고 정보를 공개하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 넷플릭스(Netflix) 합병 계약 | 파라마운트-스카이댄스(PSKY) 제안 | |
| 제안 가치(명목) | 주당 $27.75 (현금+주식) + 잔존 지분 | 주당 $30.00 (전액 현금) |
| 자금 조달 확실성 | 시가총액 $400B 및 우량한 재무 기반 활용 | $94.65B 규모의 과도한 부채 조달(LBO) 의존 |
| 거래 종결 기간 | 상대적으로 짧고 규제 승인 가능성 높음 | 12-18개월의 장기 소요 및 불확실성 증대 |
| 계약 파기 비용 | $5.8B의 해지 수수료 보장 (규제 불허 시) | $2.8B 수수료 및 $4.7B의 즉각적 비용 발생 |
| 사업적 영향 | 핵심 사업부문 집중 및 리스크 감소 전략 | 분할 중단 요구 및 경영권 간섭에 따른 가치 훼손 |
당초 WBD 이사회는 넷플릭스와 합병하는 계약을 추진 중이었다. 넷플릭스는 WBD의 할리우드 스튜디오와 HBO, 스트리밍 부문을 인수하기 위해 주당 약 $27.75 수준의 가치를 현금과 주식으로 제안했다. 이에 반해 파라마운트-스카이댄스는 WBD 전체 사업 부문을 주당 $30 전액 현금으로 매수하겠다는 공격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표면적인 가격만 보면 파라마운트의 제안이 우월해 보였으나 WBD 이사회는 단순히 명목 가격에 현혹되지 않고 제안의 실질적 가치와 이행 가능성을 정밀하게 해부했다.
WBD 이사회는 파라마운트의 제안을 '역사상 최대 규모의 차입매수(LBO)'라고 평가절하하며 그들이 제시한 $94.65B의 자금 조달 계획이 기업의 부채 비율을 위험 수준으로 끌어올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파라마운트-스카이댄스의 시가총액이 $14B에 불과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들의 제안은 주주들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재무적 리스크를 전가하는 행위로 판단되었다. 특히 넷플릭스와 맺은 계약을 파기했을 때 지불해야 할 $2.8B의 해지 수수료와 부채 상환 실패 비용 등을 합치면 주당 약 $1.79에 달하는 가치가 즉각적으로 소멸한다는 점도 명확히 공시되었다.
이러한 이사회의 판단 과정은 미국의 증권 규정인 '권고 성명서(Schedule 14D-9)'를 통해 주주들에게 실시간으로 투명하게 전달되었다. WBD의 공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사회가 내부에 '거래위원회'를 두고 외부 자문을 포함한 회의를 통해 제안 변경 사항을 검토했다는 점이 구체적으로 적시되었다. 해당 회의에는 복수의 자문기관과 법률 자문 및 커뮤니케이션 자문까지 참여한 것으로 공시되어 있다.
둘째, 경쟁 제안이 '상향 가능'하다는 신호가 이사회 구성원에게 직접 전달되었고, 그 사실 자체가 공시되었다. 이사회 구성원은 즉시 이를 경영진에 보고하였고, 경영진은 합병 상대방인 넷플릭스에도 즉시 알린 것으로 적시되어 있다.
셋째, 이미 체결된 합병 계약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상대방(넷플릭스)이 제한적 범위의 '협상 허용'을 제공했고, 그 기간·범위·종료 시점이 문서로 정리되어 공시되었다. 또한 그 제한적 기간 동안 WBD가 PSKY와 협상을 통해 '최선이자 최종(best and final)' 제안을 끌어내기 위한 조치를 했다는 점도 공시되었다.
넷째, 이사회가 왜 경쟁 제안을 '열위'로 평가했는지를 일정한 구조로 정리해 공시했다. 특히 '제안은 바뀔 수 있고, 공시된 문서로 확인되는 조건을 기준으로 평가하겠다'는 취지, 그리고 여러 차례 지적한 '부족 및 결함(deficiencies)'이 해소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반복되어 있다.
미국에서 이사회가 M&A 제안을 다룰 때 공시가 핵심이 되는 이유는 제도적으로 공시가 ‘선택’이 아니라 ‘구조’로 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첫째, 공개매수(tender offer) 상황에서 대상 회사는 일정 기한 내에 입장을 밝히는 규범을 부담한다. 미국 SEC 규정 설명 자료에 따르면 Regulation 14E 체계에서 대상 회사는 공개매수 개시 후 10영업일 이내에 (i)수락 권고, (ii)거부 권고, (iii)중립, (iv)입장 유보 중 하나를 밝히도록 요구된다. 그 입장은 통상 Schedule 14D-9를 통해 제출·공개된다. 둘째, 합병계약과 같은 ‘중대한 확정 계약(material definitive agreement)’이 체결되면 상장사는 Form 8-K를 통해 계약의 당사자·체결일·중요 조건 등을 공시하도록 요구받는다(예: Item 1.01). 즉 거래가 확정되는 순간 공시는 자동적으로 따라붙는다. 셋째, 주 회사법의 핵심 전장인 델라웨어 판례법은 특히 경영권 매각(sale of control) 국면에서 이사회가 주주가치 극대화, 즉 이사회가 “주주에게 합리적으로 가능한 최선의 가치를 확보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판시하고 있다.
이 세 가지가 결합하면 ‘공시의 의미’가 달라진다. 공시는 단순히 투자판단을 돕는 친절한 안내문이 아니라 (1)이사회가 절차를 제대로 설계하도록 압박하고, (2)이해상충을 드러내며, (3)사후 책임 판단(소송·규제)을 가능하게 하는 인프라가 된다. 다시 말해 공시가 있어야 충실의무가 현실에서 작동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인수 제의와 관련한 이사회의 의견 표명이나 정보 공시에 대해 아무런 강제성이 없다. 이는 결국 기업 가치 제고를 위한 시장의 압력이 이사회라는 장벽에 가로막혀 분산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따라서 상법 개정의 취지를 완성하고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실질적으로 해소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의 개정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첫째, 지배주주의 경영권 변경을 목적으로 하는 유의미한 인수 제안이 발생했을 때 이사회가 해당 사실을 즉시 ‘주요사항보고서(자본시장법 제161조)’로 공시하도록 의무화해야 한다. 이는 정보의 독점을 막고 시장 전체에 평등한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이다. 둘째, 공개매수나 인수 제안에 대해 이사회가 독립적인 전문 절차를 거쳐 분석한 결과를 공개하도록 의무화해야 한다. 단순히 찬반 여부만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Schedule 14D-9와 같이 제안의 가치 평가, 자금 조달의 안정성, 기업 미래에 미치는 영향 등을 조목조목 짚어낸 이사회의 의견서를 제출하게 함으로써 주주들이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셋째, 이러한 공시 과정에서 이사회의 판단 근거가 되는 외부 전문기관의 자문 보고서나 공정성 의견(Fairness Opinion)의 주요 내용을 포함하도록 하여 공시의 질적 수준을 높여야 한다.
요컨대 사실공시를 통해 회사에 어떠한 진지한 제안이 있는지를 주주에게 알리고, 평가공시를 통해 단순한 결론이 아니라 그 결론에 이르는 과정을 주주에게 공시하여 주주가 이사회의 충실의무 이행을 실제로 판단할 수 있게 하는 것이 핵심이다. WBD 사례에서 보듯 거래조건의 비교, 자문기관의 참여, 협상 주체를 제한하는 waiver, 경쟁 제안을 ‘최선과 최종(best and final)’으로 끌어내는 과정이 공시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사의 충실의무 상법 개정은 한국 자본시장의 체질을 개선하기 위한 위대한 첫걸음이다. 하지만 법률상의 선언이 시장의 실질적인 변화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이사회가 주주를 위해 어떻게 고민하고 판단했는지를 세상에 드러내는 공시제도의 정비가 시급하다. WBD 이사회의 사례에서 보듯 투명한 정보 공개는 이사회가 지배주주의 거수기가 되는 것을 막고 충실의무를 달성하게 하는 장치다. 우리가 ‘이사 충실의무’의 실효성을 논한다면 이제 논점은 자본시장법으로 옮겨가야 한다. 상장회사 M&A 제안에 대한 공시 의무—특히 제안의 존재와 이사회 평가 과정의 공시—를 법으로 정립해야 한다. 자본시장법 개정은 상법 개정의 후속이 아니라 상법 개정을 실제로 작동시키는 다음 단계가 될 것이다.
상법 개정으로 자본시장의 주춧돌이 마련되었다. 튼튼하고 살기 좋은 집은 주춧돌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튼실한 주춧돌 위에 다양한 건자재를 덧붙여 좋은 집을 만들어야 한다. 자본시장법의 공시제도 정비는 이와 같은 건자재 중 하나다. 시장에서 새로운 관행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이런 제도 정비를 통해 새로운 관행을 만들어 간다면 멀게만 보였던 코스피 5000을 빠르게 돌파하고 6000 도달도 쉽게 보이는 시장이 안착될 것이다.
▷서울대 경제학 박사 ▷제21대 국회의원 ▷카카오뱅크 공동대표 ▷한국투자신탁운용 총괄 최고투자책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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