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자의 영화 이야기④ | 인간·문화·자연] '왕과 사는 남자'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왕을 지킨 여자들'

권력은 번쩍이지만, 사람의 정은 오래 남는다. 영화'왕과 사는 남자'는 그 오래 남는 것을 붙든 작품이다. 왕을 지킨 두 여인, 궁녀 매화와 정순왕후 송씨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비로소 인간이 무엇으로 사는지 묻게 된다.
 
영화는 어린 단종, 곧 단종 이홍위의 숨결에서 시작된다. 아직 왕이기보다 아이에 가까운 소년 왕자. 매화는 그 아이의 곁에 선다. 새벽이면 가장 먼저 일어나 작은 손을 씻기고, 차가운 물에 놀라지 않도록 제 손으로 물을 덥힌다. 버선발을 맞춰 신겨 주고, 어깨에 흘러내린 곤룡포 자락을 조심스레 여민다. 아이 왕자가 글자를 더듬다 막히면, 뒤에서 조용히 등불을 가까이 옮겨 준다.

그 눈빛에는 군신의 위계가 없다. 아이가 넘어질까 한 발 물러서 지켜보는 누이의 마음, 밤에 악몽을 꾸면 방문 밖에서 숨죽이며 서 있는 어머니의 마음이 있다.
 
단종이 처음으로 홀로 대전에 나서는 날, 매화는 문 뒤에서 조용히 손을 모은다. 아이가 긴장한 채 입술을 깨물자, 그녀는 눈으로 말한다. “괜찮습니다, 전하.” 그 한마디 눈빛이 소년 임금의 등을 떠민다.
 
그러나 궁궐의 바람은 그리 따뜻하지 않다. 숙부의 그림자가 길어지고, 아이의 어깨는 하루가 다르게 무거워진다. 폐위의 날, 매화는 그 곤룡포를 다시 벗겨야 한다. 왕의 옷이 벗겨지는 순간, 매화의 손이 잠시 떨린다. 그러나 눈물은 떨어지지 않는다. 울면 아이가 무너질까 두려워서다. 그녀는 대신 담담하게 말한다. “전하, 옷은 바뀌어도 사람은 바뀌지 않습니다.”
 
영월 청령포. 강물은 차고, 바람은 날 선 칼처럼 불어온다. 단종은 식음을 전폐한 채 강가를 바라본다. 매화는 엎드려 쌀 한 톨을 씻고, 마른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지핀다. 아이 임금의 손이 얼어붙을까 자신의 소매로 감싸 쥔다. 밤이면 초라한 등불 아래에서 아이 임금의 머리를 빗어 준다. 그 머리카락 사이로 왕관 대신 차디찬 동강의 영월바람이 스친다.
 
마지막 밤, 단종은 매화에게 편지를 남긴다. “어렸을 때부터 나를 지켜 준 당신은 신하가 아니라 가족이오. 다음 생에 다시 만나면 친구로 만나고 싶소.” 매화는 그 편지를 품에 안고 무너진다. 그러나 울음은 소리 없이 스민다. 소년 임금을 마지막까지 흔들리지 않게 지켜야 했던 사람의 울음이다. 배우 전미도는 이 장면에서 절제된 숨 하나로 관객의 가슴을 파고든다. 말보다 긴 침묵, 그것이 매화라는 인물의 완성이다. 그리곤 자신도 동강의 짙푸른 파랑속으로 뛰어든다.
 
다른 한쪽에서, 정순왕후의 시간은 더 길고 더 잔인했다. 청계천 영도교에서 남편을 떠나보낸 뒤, 그녀는 여든을 넘겨 생을 마칠 때까지 단종을 가슴에 묻고 살았다. 권력의 파도가 수차례 뒤집히는 것을 두 눈으로 보았다.
 
세조가 승하하던 날, 왕비는 조용히 소식을 들었다. 원망도 환호도 없었다. 다만 깊은 숨 하나. 그 뒤를 이은 예종의 짧은 치세와 급작스러운 죽음. 또다시 왕위는 바뀌고, 궁궐은 상복으로 덮인다. 성종의 시대가 열리고 닫히는 것을 지켜보며, 왕비는 말없이 바느질을 한다. 실 한 올이 지나가듯 시간도 지나간다.
 
연산군이 폐위되었다는 소식이 들리던 날, 노년의 정순왕후는 오래도록 창밖을 바라본다. 세조의 피로 이어진 권력은 끝내 피의 소용돌이 속에서 무너진다. 그녀는 복수의 칼을 들지 않았다. 다만 시간을 견뎠다. 권력은 세대를 건너지 못했지만, 그녀의 기억은 세대를 건넜다.
 
여든이 넘은 어느 날, 그녀는 마지막 숨을 고르며 낮게 읊조린다. "열일곱의 젊은 이 내신랑이 팔십이 넘은 이 늙은 신부를 알아볼 수 있을까." 그 질문은 한 여인의 절망이 아니라, 사랑의 완결이다.
 
세상은 그녀의 죽음을 조용히 지나쳤으나,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의 시댁인 해주 정씨 가문이 장례를 거두었다. 그 가문의 묘역에 들어선 것이 오늘의 사릉이다.
 
남양주시 사릉의 소나무는 아이 임금이 계신 동쪽을 향해 선다 전해진다. 동쪽, 영월 청령포의 방향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 우리는 그 이야기를 믿고 싶다.
나무도 사람처럼 그리움을 안고 선다고. 자연은 인간의 마음을 닮아 자란다고.
 
영화는 우리에게 속삭이듯 묻는다. 무엇이 왕을 왕답게 하는가. 곤룡포인가, 아니면 곁을 지킨 사람인가. 매화는 끝까지 아이 임금의 손을 놓지 않았고, 정순왕후는 끝까지 남편 단종을 잊지 않았다. 권력은 사라졌으나, 그들의 지고지순한 사랑은 남았다.
 
수백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세조의 권세보다 단종의 눈물을 기억한다. 더 정확히는, 그 눈물을 닦아 준 손길을 기억한다. 인간은 권력으로 남지 않는다. 정성과 사랑으로 남는다.
 
인간과 문화, 자연. 그 세 갈래가 만나는 자리에서 역사는 눈물이 된다. 왕을 지킨 두 여인의 충절은 특정 시대의 미담이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오래된 답이다.
 
곁을 지키는 삶. 그것이 가장 깊고도 순결한 인간성이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 포스터
영화 왕과 사는 남자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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