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의 인도 국빈 방문은 외교 일정표에 이름 하나 더 올리는 행사가 아니다. 4월 19일부터 24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순방은 인도와 베트남을 잇는 연쇄 방문으로 짜였고, 인도에서는 20일 나렌드라 모디 총리와 정상회담이 예정돼 있다. 한국 대통령의 인도 국빈 방문으로는 2018년 7월 이후 8년 만이다.
대통령실이 밝힌 핵심 의제는 한-인도 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CEPA) 개선, 조선·해양, 인공지능(AI), 방산, 에너지 공급망 협력이다. 목록만 놓고 보면 통상 외교의 어휘처럼 들린다. 그러나 지금의 맥락 속에서 읽으면, 이는 의전보다 구조의 문제이고 친선보다 생존의 문제에 더 가까운 방문이다.
왜 지금 인도인가. 답은 세계지도의 한가운데가 아니라 바다의 목줄에 있다.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중동의 불안은 한국 경제의 가장 취약한 지점을 다시 노출시켰다. 한국은 지난해 원유 수입의 61%를 호르무즈를 경유하는 항로에 의존했고, 중동산 원유 비중은 2025년 기준 69.6%에 달했다. 인도 역시 중동 에너지 의존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로이터에 따르면 올해 1월 기준 인도의 원유 수입 중 중동산 비중은 55%까지 올라갔다. 다만 인도는 러시아, 미국, 서아프리카로 공급선을 넓혀 한국보다 완충력이 크다.
결국 두 나라는 같은 충격파에 노출돼 있지만, 인도는 규모와 다변화로 버티고 있고 한국은 정밀 산업과 해상 물류의 민감도 때문에 더 예리하게 흔들린다. 그래서 이번 정상회담은 단순한 시장 개척의 문제가 아니다. 에너지와 공급망의 공동 방어선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를 묻는 회담이다.
그러나 그 숫자보다 중요한 것은 숫자가 가리키는 방향이다. 한국 외교가 '선진국 외교'와 '가치 외교'의 수사에 머무르지 않고, 산업과 에너지와 기술의 새 지도를 실제로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는 신호다.
한국과 인도가 가까워져야 하는 이유는 경제적 계산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두 나라에는 역사적 공통분모가 있다. 둘 다 식민의 기억을 가진 나라다. 인도는 영국 제국의 지배를 겪었고, 한국은 일본 제국주의의 강점을 통과했다. 둘 다 해방 이후 국가 건설과 민주주의의 경로를 순탄하게 걷지 못했다. 분열과 빈곤, 권위주의와 정치적 격동을 거쳐 오늘의 체제를 만들었다. 두 나라의 민주주의는 같은 형태도, 같은 속도도 아니었다. 그러나 외세의 압력 속에서도 국가의 자율성을 지키려 했고, 대중의 정치 참여를 통해 체제를 다져 왔다는 점에서는 닮아 있다.
인도가 오랫동안 '전략적 자율성(Strategic Autonomy)'을 외교 원칙으로 내세워 왔다는 점은 특히 한국이 곱씹어볼 대목이다. 어느 강대국의 편도 들지 않으면서 국익을 최우선에 두는 이 원칙은, 이제 한국이 새로 절감하고 있는 공급망·에너지 안보의 필요와 같은 뿌리에서 자란다. 지난 2월 한-인도 외교·안보 대화에서 양국이 '특별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계속 발전시키겠다고 재확인한 것은 그 공명의 공식 확인이었다.
문화적 자존심도 닮아 있다. 한국은 근대화 과정에서도 전통을 버리지 않으려 애썼고, 인도는 다언어·다종교·다민족 사회의 복합성 자체를 문명의 자산으로 보존해 왔다. 한국이 인도를 볼 때 흔히 범하는 실수는 '크지만 복잡한 나라', '기회는 많지만 먼 나라'라는 거리감의 프레임이다. 그러나 인도는 자국의 다양성을 약점이 아니라 경쟁력으로 읽는다. AI와 디지털 공공 인프라, 제조업 육성, 해양 전략이 그 다양성 위에서 동시에 작동하는 나라다. 이런 나라는 단순한 소비시장이 아니라 세계 질서 재편기의 또 다른 축이다.
올해 1월 고랑랄 다스 주한 인도대사가 아주경제·AJP와의 인터뷰에서 조선, 반도체, AI, 에너지를 한-인도 협력의 핵심 분야로 꼽으면서, 인도 정부가 조선업을 국가 핵심 산업으로 밀고 있고 한국 기업들이 그 기회를 적극 활용하길 바란다고 했다. 인도의 '전략적 자율성'을 명시적으로 강조하면서, 동아시아가 인도의 성장 전망에 핵심이고 그 중심에 한국이 있다고도 했다. 이 발언은 외교적 수사가 아니라 이번 정상회담 의제의 예고편이었다. 회담 테이블에 오를 산업 분야와 거의 정확히 겹친다.
인도가 내미는 손은 추상적이지 않다. 인도 정부는 조선산업 육성을 위해 대규모 금융지원, 비용보전, 해양 클러스터 개발을 추진 중이다. 중국이 완성된 경쟁자라면, 인도는 함께 판을 짤 수 있는 성장형 파트너다. 한국 조선업이 중국의 저가 공세와 글로벌 발주 변동성에 동시에 시달리는 지금, 인도는 생산기지·수요시장·기술이전 파트너라는 세 얼굴을 동시에 갖는다.
AI와 반도체에서도 구도는 선명하다. 인도는 방대한 인구와 데이터, 다언어 환경, 빠른 디지털 확산 속도를 가지고 있다. 한국은 반도체·제조·응용기술의 강점을 가지고 있다. 둘을 겹치면 빈틈이 채워진다. 에너지에서는 더욱 분명하다. 인도의 광대한 재생에너지 잠재력과 한국의 원전·전력망·에너지저장·소형모듈원전(SMR) 역량은 구조적으로 상호보완적이다. 미래의 에너지 자립은 한 나라가 홀로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강점을 엮어 체계를 설계하는 능력에서 나온다.
여기서 이번 방문의 더 깊은 의미가 드러난다. 두 나라가 모두 민주주의 국가라는 사실은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따로 있다. 스스로를 지킬 국방, 스스로를 먹일 에너지, 스스로를 성장시킬 산업 기반을 갖추지 못한 민주주의는 외부 충격 앞에서 쉽게 흔들린다. 반대로 자주 국방과 자주 에너지, 기술 주권을 갖춘 민주주의는 외교의 선택지도 넓어진다. 한국과 인도는 아시아에서 민주주의가 단지 선거의 형식이 아니라 국가 생존의 장치가 될 수 있음을 실증할 잠재력을 가진 나라다.
미국과 중국의 대립이 구조화될수록, 중동의 불안이 반복될수록, 각국은 줄을 서기보다 버틸 수 있는 체질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그 체질은 혼자 완성되지 않는다. 민주주의를 지속하려면 민주주의 국가끼리 산업과 안보와 에너지의 실질적 연결망을 촘촘히 짜야 한다. 한국의 기술, 인도의 규모, 양국의 역사적 자존심과 제도적 경험이 결합한다면, 그것은 서방이 설계한 질서의 하청이 아니라 아시아가 스스로 만드는 자립의 문법이 될 수 있다.
아직도 많은 한국인에게 인도는 멀다. 뉴스에는 자주 등장하지만 삶의 감각으로는 닿지 않는 나라다. 그러나 그 '멀다'는 인식이 이미 현실이 아니다. 중동의 위기는 서울의 주유소 가격을 흔들고, 인도의 산업정책은 울산과 거제의 수주 전략에 영향을 미치며, 인도의 디지털 전환은 한국의 AI·반도체 기업에 새로운 생태계를 열고 있다. '먼 나라'라는 인식이야말로 가장 낡은 지정학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주뉴스코퍼레이션과 AJP가 주최하는 한-인도 문화·혁신 공모전은 단순한 이벤트를 넘어선다. 주한 인도대사관, 스와미 비베카난다 문화원, AJU PRESS가 공동으로 여는 이 공모전은 '한 프레임에 담은 우리의 순간과 미래'를 주제로 AI 영상과 영어 에세이를 모집하고 있다. 국가 간 전략 협력은 정부 문서와 정상회담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서로를 상상하는 능력, 서로를 가까운 미래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감각이 뒤따라야 한다. 외교는 결국 국민의 거리감을 줄이는 일까지 해낼 때 비로소 지속된다.
한국은 이제 인도를 '언젠가 중요해질 나라'로 대할 시간이 없다. 이미 중요한 나라다. 더 정확하게는, 함께 버텨야 할 나라다. 식민의 기억을 딛고 민주주의를 세웠고, 전통과 문명에 대한 깊은 자부심을 잃지 않은 두 아시아 국가는 지금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어떻게 외부 충격에 휘둘리지 않을 것인가. 어떻게 스스로를 지킬 것인가. 어떻게 성장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을 것인가.
이번 정상회담이 진정으로 의미 있으려면 선언보다 설계가 있어야 한다. CEPA 개선은 속도를 내야 하고, 조선·방산·AI·에너지 협력은 양해각서 수준을 넘어 기업과 금융, 인력과 제도까지 잇는 구조로 구체화돼야 한다. 그리고 그 모든 논의 위에 더 큰 메시지 하나가 놓여야 한다.
아시아의 민주주의는 수입된 질서만으로 버티지 않는다. 자주 국방, 자주 에너지, 전략 산업의 협력을 통해 스스로의 힘을 키울 때 비로소 오래 간다. 한국과 인도가 함께 그 모델을 증명해야 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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