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글로벌 10% 관세’가 미국 연방국제통상법원에서 또다시 위법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이번 판결을 두고 보호무역 후퇴나 자유무역 복귀 신호로 해석하는 것은 현실과 거리가 멀다. 법원이 제동을 건 것은 관세의 ‘방식’이지, 미국 정치권 전반으로 확산된 산업보호 흐름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 판결의 핵심도 거기에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을 활용한 상호관세가 막히자 곧바로 무역법 122조를 꺼내 전 세계 수입품에 10% 관세를 일괄 부과했다. 하지만 법원은 122조가 원래 국제수지 위기 같은 예외적 상황에 한시적으로만 쓰이도록 설계된 조항이라고 봤다. 결국 이번 결정은 “대통령 권한 남용”에 대한 판단이지, 미국 제조업 보호 필요성을 부정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미국 통상정책은 지금부터가 본게임에 가깝다. 트럼프 행정부와 미국무역대표부(USTR)는 이미 무역법 301조 중심 체제로 이동하고 있다. 301조는 긴급명령식 관세와 다르다. 특정 국가의 산업 구조와 보조금, 공급망 영향력, 가격 왜곡 여부를 조사하고 공청회를 거쳐 관세나 제재를 부과하는 구조다. 절차는 길지만 대신 법적 정당성이 강하다. 실제 미·중 무역전쟁의 핵심 관세 상당수도 이 틀 안에서 유지됐다.
여기서 한국이 주목해야 할 부분은 미국이 최근 꺼내든 표현이다. 미국은 한국을 포함한 주요 제조국들을 상대로 ‘구조적 공급과잉’을 문제 삼기 시작했다. 이는 단순히 특정 품목 수입이 많다는 의미가 아니다. 미국이 자국 산업 생태계를 약화시킨다고 판단하는 해외 제조 경쟁력 자체를 겨냥하기 시작했다는 뜻에 가깝다.
특히 반도체·배터리·철강·조선처럼 한국이 강점을 가진 산업들이 모두 조사 대상과 겹친다는 점은 가볍지 않다. 미국 입장에서는 한국이 동맹인 동시에 경쟁력 있는 제조 강국이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현대차와 배터리 기업들은 미국 공급망 재건의 핵심 축으로 환영받고 있지만, 동시에 미국 내부에서는 “첨단 제조 주도권은 결국 미국이 가져와야 한다”는 압박도 강해지고 있다. 협력과 견제가 동시에 작동하는 구조다.
이 지점에서 한국이 경계해야 할 것은 단기 판결에 안도하며 상황을 낙관하는 태도다. 지금 미국 통상정책은 단순한 무역수지 조정이 아니라 산업안보 전략으로 바뀌고 있다. 과거 자유무역 체제에서는 효율성과 가격 경쟁력이 우선이었다면, 이제 미국은 공급망 통제력과 제조업 기반 유지 자체를 국가안보 문제로 보고 있다. 그 결과 동맹 여부보다 “미국 산업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가 더 중요해지고 있다.
한국 대응이 단순히 대미 투자 규모를 강조하는 방식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미국이 원하는 것은 자본 유입 자체보다 기술·생산·고용의 통제력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한국은 미국 공급망 안에서 단순 하청 생산기지가 아니라, 미국도 쉽게 대체할 수 없는 기술·생산 파트너라는 점을 더 치밀하게 입증해야 한다.
동시에 내부적으로는 특정 산업과 특정 시장 의존도를 줄이는 작업도 더 미룰 수 없게 됐다. 미국의 압박이 전략산업 중심으로 좁혀질수록 반도체 한 축에 과도하게 기대는 한국 경제 구조는 더 큰 변동성에 노출될 수 있다. 통상 리스크가 곧 환율과 증시, 고용 충격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그만큼 커진다.
이번 미국 법원 판결은 트럼프 관세의 실패가 아니다. 오히려 미국 보호무역이 즉흥적 정치 구호 단계를 넘어, 법과 제도를 활용한 산업 재편 전략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신호에 가깝다. 한국이 대비해야 할 대상 역시 특정 관세가 아니라, 미국 경제 질서의 방향 변화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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