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불모지에 생명과학 씨앗 뿌린 조완규 전 서울대 총장 별세

  • 생명과학 개척·과학기술 정책 이끈 98년…"과학은 사람" 신념 남기고 영면

조완규 초대 과학기술한림원장 사진한국과학기술한림원
조완규 초대 과학기술한림원장. [사진=한국과학기술한림원]

한국 생명과학의 기틀을 닦고 과학기술과 교육 발전에 평생을 바친 조완규 전 서울대학교 총장이 13일 별세했다. 향년 98세.

고인의 98년 생애는 대한민국이 가난과 전쟁을 딛고 과학기술 강국으로 성장해 온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1928년 황해도 재령군에서 태어난 고인은 판사였던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평양과 순천, 해주 등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광복 후 월남해 대전에 정착했다.

고인의 집안은 대전에서 이름난 ‘수재 집안’으로 통했다. 부친 조용순은 법무부장관과 대법원장을 지냈고, 동생 조덕규는 건설부 제2차관보를 지냈다. 고인은 대전고를 거쳐 서울대 문리과대학 생물학과에 진학했다. 법조 명문가에서 성장했지만 아버지의 뒤를 따라 법조인의 길을 걷는 대신 당시로서는 생소했던 생물학자의 길을 선택했다.

수재 집안의 전통은 다음 세대로도 이어졌다. 장남 조진원은 연세대 생명시스템대학 시스템생물학과 교수로 부자가 2대에 걸쳐 생물학자의 길을 걸었다. 차남 조진완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카네기멜런대에서 금융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받은 뒤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 등을 지냈다.

고인이 연구를 시작했을 때 대한민국은 과학기술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한국인의 출생성비 연구를 시작으로 포유동물의 난자와 수정란, 배아 연구에 뛰어들어 국내 발생생물학 분야를 개척했다.

1957년 서울대 전임강사로 부임한 뒤 교수와 자연과학대학 초대 학장, 부총장을 거쳐 1987년 제18대 서울대 총장에 취임했다.

6·10 민주항쟁 직후 관선 총장으로 취임한 그에게는 ‘소방수 총장’ ‘위기관리 총장’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러나 고인은 시대의 변화를 거스르지 않았다. 교수협의회를 활성화하고 대학 민주화와 안정에 힘을 쏟으며 격변기의 서울대를 이끌었다.

고인의 활동 무대는 대학에 머물지 않았다. 1992년 교육부 장관을 지낸 뒤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초대 원장, 한국바이오산업협회 회장 등을 맡아 대한민국 과학기술 발전에 힘썼다.

국제백신연구소 유치위원장을 맡아 연구소의 한국 유치를 이끈 것도 고인이 남긴 중요한 업적이다.

고인의 삶을 관통한 것은 ‘과학’과 ‘사람’이었다. 자원이 부족한 대한민국이 세계와 경쟁하려면 과학기술에 투자하고 사람을 키워야 한다는 신념을 평생 굽히지 않았다.

그가 연구를 시작했을 때 대한민국은 과학기술의 불모지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2026년 대한민국은 반도체와 바이오, 인공지능(AI)을 앞세워 세계 기술 패권 경쟁에 나서고 있다. 황해도에서 월남해 대전에 정착한 청년은 생물학자가 됐고 대한민국 최고 대학을 이끌었으며 한국 생명과학의 큰 어른으로 남았다.

사람은 떠났지만 그가 키운 사람과 그가 열어 놓은 길은 남았다. 조완규의 98년은 한 과학자의 삶이자 대한민국 과학기술 성장의 역사였다.

유족은 부인 홍성현씨와 2남1녀(조진원<연세대 시스템생물학과 명예교수>·조인숙·조진완<한국금융산업연구원장>), 사위 윤병우(서울대 의과대학 명예교수>씨, 며느리 송영미·이양숙씨 등이 있다. 고인의 장례는 대한민국 과학기술계에 남긴 업적을 기려 '한국과학기술한림원장(葬)'으로 엄수된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 발인 16일 오전 7시, 장지는 시안추모공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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