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여진의 차이나로그] 국적을 지운 드라마, 보이지 않는 중국의 소프트파워

  • 200여개국 덮은 中 숏폼 성공비결

  • '중국' 지우기…공자학원과 반대

  • 中 소프트파워의 새로운 공식


미국 어느 도시, 전 남자친구의 결혼식장에 한 여자가 나타난다. 알고 보니 신랑은 재벌 회장이었고, 두 사람이 헤어진 데에는 출생의 비밀이 있었다. 한 회의 길이는 1~2분, 매회 반전으로 끝나고 다음 편을 보려면 결제해야 한다. 50편을 다 봐야 결말이 나온다.

배우는 백인, 촬영지는 뉴욕이다. 대본도 현지 작가가 썼다. 얼핏 보면 미국에서 만든 콘텐츠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드라마를 만든 곳은 할리우드가 아닌 중국 자본의 플랫폼 드라마박스(DramaBox)다. 화면 어디에도 '중국산'이라는 표시는 없다.

한국에서 숏폼은 흔히 10대의 전유물로 여겨진다. 그러나 지금 전 세계 숏폼 시장에서 벌어지는 일은 단순한 유행이 아니다. 중국 산업계가 발간한 백서에 따르면, 중국 미니드라마 앱의 해외 매출은 2025년 1~8월 15억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약 195% 증가했다. 같은 기간 글로벌 다운로드는 약 7억3000만건으로 370% 넘게 폭증했다. 드라마박스·릴쇼트·쇼트맥스 등 주요 플랫폼에서 제작되는 콘텐츠들은 배우도 모두 외국인이고 촬영지도 미국·브라질·동남아 등지다. 200여 개국에 퍼진 숏폼 앱 시장의 상위권은 대부분 중국계 플랫폼이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그 어디에도 중국산이라는 흔적은 없다.

중국의 문화 공세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공자학원을 떠올린다. 중국 정부가 세계 각국 대학에 자금을 대고 중국어·문화 교육을 명목으로 세운 기관이다. 그런데 운영해 보니 달라이 라마 초청은 취소되고, 톈안먼이나 신장 문제는 수업에서 알아서 배제됐다. 결국 학문의 자유를 침해하는 선전 기관이라는 비판이 거세졌고, 미국에서 2017년 118곳에 달했던 공자학원은 2022년 7곳으로 급감했다. 스웨덴·노르웨이·핀란드는 자국 내 공자학원을 전면 정리했다. 국가의 의도가 너무 선명하게 드러난 탓이었다.

숏폼은 정확히 그 반대편에 서 있다. 현지 배우를 쓰고, 현지 작가가 대본을 쓰고, 현지 정서에 맞는 이야기를 만든다. 콘텐츠는 치정·복수·신데렐라 서사로, 철저히 시장 논리를 따른다. 그 안에는 중국을 설명하려는 의도도, 중국을 이해시키려는 메시지도 없다. 국적을 지운 자리에 전 세계 누구나 소비할 수 있는 이야기만 남았다.

흥미로운 것은, 이 산업을 이끄는 주체가 국가가 아니라 돈을 좇는 민간 기업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중국 당국은 이 성공을 빠르게 국가 전략으로 흡수하고 있다. 중국 국가광전총국은 미니드라마를 중국 영상산업의 새로운 성장 동력이자 해외 영향력 확대의 중요한 수단으로 평가하고 있다. 시장이 만든 무기를 국가의 소프트파워 자산으로 끌어안은 것이다.

중국이 이 통로에 주목하는 배경에는 오래된 자의식이 깔려 있다. 경제력·군사력·기술력에서는 미국을 바짝 추격했지만, 문화만큼은 미국은 물론 한국에조차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 인정해 왔다. 방탄소년단이 빌보드를 점령하고 '오징어게임'이 넷플릭스 세계 1위를 찍는 동안, 중국은 천문학적 예산을 쏟아부은 자국 콘텐츠가 세계 시장에서 번번이 외면받는 현실을 지켜봐야 했다. 중국 드라마와 영화는 오래도록 자국 안에만 머물렀다. 숏폼은 중국 서사 콘텐츠가 처음으로 국경을 넘어 글로벌 시장에서 성공을 거둔 사례였다.

그러나 한류와는 결이 다르다. 오징어게임은 한국 사회의 불평등을 날것으로 드러냈고, 기생충은 계급을 정면으로 건드렸다. 한류의 정점들은 불편한 질문마저 감추지 않았고, 세계는 바로 그 드러냄에 공감했다. 반면, 중국 숏폼은 정반대의 길을 간다. 국적도, 메시지도, 불편함도 모두 지우고 오로지 자극만 남긴다. 드러내서 얻은 영향력과 지워서 얻은 영향력. 같은 시장을 향하면서도 방향은 정반대다.

그래서 콘텐츠 안에 중국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안심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국적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그 콘텐츠가 흐르는 통로다. 그리고 그 통로의 상당 부분은 중국 기업들이 쥐고 있다. 공자학원은 중국을 드러내려다 문을 닫았고, 드라마는 중국을 지워서 세계 시장 속으로 스며들고 있다. 노골적인 선전의 시대가 저문 자리에, 출처를 묻지 않는 콘텐츠의 시대가 왔다.

- 최여진 맥스밸류 캐피털 최고경영자(CEO), 중국 사회과학원 대학 국제커뮤니케이션 박사 과정
최여진 맥스밸류 캐피털 CEO
최여진 맥스밸류 캐피털 C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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