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이 만든 고품질 리소스는 이제 누구나 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술 자체보다 이용자의 감정을 축적하는 경험이 앞으로 게임 시장의 경쟁력을 가를 핵심 변수가 될 것입니다."
박병림 디나미스 원 대표는 최근 아주경제와 만나 AI 시대 게임 시장의 변화와 서브컬처 장르에 대한 자사의 개발 철학을 이같이 밝혔다. 그는 글로벌 게임사에서 서브컬처 게임 개발 경험을 쌓고 다수의 주요 프로젝트를 이끌어온 프로듀서로, 2024년 디나미스 원을 설립해 첫 서브컬처 게임 '아스트라에 오라티오'를 개발하고 있다.
생성형 AI의 고도화는 게임 개발 환경을 근본적으로 바꿔놓고 있다. 개발 효율성이 비약적으로 상승하면서 소규모 팀도 과거 대형 스튜디오에 준하는 그래픽과 연출을 구현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하지만 이 같은 기술적 상향 평준화는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동반했다. AI가 무분별하게 생성해낸 저품질·양산형 콘텐츠를 뜻하는 'AI 슬롭(AI Slop)'이 글로벌 시장 전반에 범람하기 시작한 것이다.
박 대표는 "누구나 일정 수준 이상의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된 환경에서 역설적으로 '이 작품에서만 느낄 수 있는 고유한 감정'을 만들어내는 역량이 개발사의 핵심 경쟁력으로 떠올랐다"고 진단했다.
이 같은 변화 속에서 게임 업계는 AI 기술과 인간 창작성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해 있다. 박 대표는 "반복적이고 정형화된 작업은 AI로 효율화하되, 캐릭터의 서사적 맥락과 정서적 몰입감처럼 기계가 재현하기 힘든 영역은 반드시 인간 창작자의 고유한 해석으로 채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AI와 인간의 역할을 명확히 분담하는 하이브리드 방식이 향후 게임 개발의 핵심 전략이 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단순히 AI로 개발 효율을 높이는 데 그치지 않고, 기술과 인간 창작성이 선순환하는 구조를 설계하는 역량이 작품의 경쟁력을 좌우한다고 봤다. 특히 창작자의 정서적 해석이 흥행 경쟁력으로 이어질 수 있는 대표적인 분야로 서브컬처 장르를 꼽았다.
애니메이션·만화·게임·소설을 아우르는 'ACGN 콘텐츠'는 디지털 플랫폼 확산과 글로벌 팬덤 성장을 바탕으로 국경을 넘나드는 생태계를 형성했다. 한때 마니아층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서브컬처가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주요 축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서브컬처는 이용자가 콘텐츠를 단순히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캐릭터와 서사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해 굿즈 수집, 코스프레, 팬아트 등 다양한 2차 창작으로 확장하는 문화적 특성을 지닌다. 이처럼 소비와 참여, 소통이 맞물리며 자생적인 팬덤 생태계를 형성하는 것이 서브컬처 문화의 핵심으로 꼽힌다.
박 대표 역시 만화와 애니메이션, 일본 콘솔 게임 등을 즐겨온 서브컬처 이용자다. 이러한 취향과 경험은 게임 개발 방향에도 자연스럽게 반영됐다.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좋아하는 분야를 선택하면서 서브컬처 게임 개발에 집중하게 됐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시장이 커질수록 경쟁도 치열해지고 있다. 높은 수준의 그래픽과 화려한 연출은 이제 차별화가 아닌 기본 요건이 됐다. 이에 대해 박 대표는 "앞으로 시장의 판도는 '무엇을 보여주는가'보다 '무엇을 기억하게 만드는가'에서 갈릴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용자는 단순히 캐릭터를 획득하는 순간에 만족하지 않는다. 가상 세계 속 인물과 함께 성장하고, 작품 곳곳에 담긴 설정과 이야기에 몰입하며 자신만의 추억을 쌓아간다. 이 경험이 견고한 팬덤을 형성하고 IP의 생명력을 연장하는 선순환 구조가 오늘날 서브컬처 시장의 진정한 흥행 공식"이라고 덧붙였다.
2024년 '오타쿠의 꿈을 실현시킨다'는 비전 아래 설립된 디나미스 원은 서브컬처의 본질을 '애정을 축적하는 장르'로 정의하고 있다. 이용자가 투자한 시간과 감정에 상응하는 가치를 돌려주고, 캐릭터와 서사에 대한 애착을 장기적 경험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서브컬처 게임의 핵심 역할이라는 철학이다.
디나미스 원의 이 같은 방향성을 가장 선명하게 구현할 첫 프로젝트가 서브컬처 역할수행게임(RPG) '아스트라에 오라티오(Astrae Oratio)'다. 독창적 세계관과 오리지널 지식재산권(IP)을 기반으로 캐릭터와 서사를 구축하고, 이용자가 오랫동안 기억하고 몰입할 수 있는 경험을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박 대표는 "단순한 이용자 규모보다 얼마나 깊이 있는 정서적 결속을 이어갈 수 있느냐가 IP의 가치를 결정한다"며 "이용자가 캐릭터와 깊은 유대감을 형성하고, 작품 속 세계와 오랜 시간 공존할 때 비로소 강력한 오리지널 IP가 완성된다"고 말했다. 단순히 게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용자의 기억 속에 오래 남는 세계와 정서를 구현하겠다는 목표다.
이러한 철학은 디나미스 원이 강조하는 '오가닉 아트(Organic Art)' 개념에도 투영돼 있다. 생성형 AI를 활용한 콘텐츠 제작이 빠르게 보편화되는 시대지만 기술 자체보다 창작자의 의도와 감정이 담긴 표현이 더 큰 가치를 만든다는 것이 핵심이다.
박 대표는 "완벽하게 정제된 디지털 결과물보다 미묘한 흔들림과 의도적인 여백, 과장된 연출처럼 인간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아날로그적 표현이 캐릭터와 세계에 진정한 생명력을 불어넣는다"고 설명했다. 오가닉 아트는 단순히 시각적 완성도를 추구하는 개념이 아니라, 개발진이 공유하는 정서적 구심점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그의 해석이다.
특히 그는 창작 환경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시장에서 독보적인 색깔을 가진 개발사가 되려면 타이틀이나 포트폴리오 이전에, 창작자가 온전히 몰입하고 창작적 유희를 느낄 수 있는 환경이 먼저 갖춰져야 한다"며 "내부 창작자의 몰입과 열정이 지속될 때 비로소 이용자에게도 진정성 있는 경험을 온전히 전달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박 대표는 '아스트라에 오라티오'와 관련해 공개된 티저 콘텐츠에 대한 이용자 반응도 면밀히 살피고 있다고 밝혔다. 이용자들이 새로운 스토리와 세계관에 높은 기대감을 보이고 있으며, 특히 배경 아트에 공을 들인 점을 알아보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 인상적이었다는 설명이다.
박 대표는 “게임의 설정과 세계관을 전달하는 데 배경이 중요하다고 보고, 사람 손의 느낌이 살아나도록 붓 터치를 살려 작업하고 있다”며 “이용자들이 배경에 많은 공을 들였다는 점을 알아봐 준 것이 실제 작업을 맡은 담당자들에게도 큰 격려가 됐다”고 말했다.
디나미스 원은 앞으로도 서브컬처 장르 개발에 집중하며 독자적인 색깔을 갖춘 서브컬처 전문 게임 개발사로 자리매김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일본을 비롯해 한국과 중국에서도 경쟁력 있는 서브컬처 개발사가 잇따라 등장하는 가운데, 디나미스 원만의 색깔을 담은 게임을 꾸준히 선보이겠다는 구상이다.
박 대표는 "서브컬처 게임 시장은 더 이상 기술이나 그래픽만으로 승부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 오리지널 IP와 감정 중심의 경험, 인간적인 표현을 통해 디나미스 원만의 길을 만들어가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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