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모습 찾은 광화문···4년전과 어떻게 달라졌나

   
 
 
(아주경제 이미호 기자) 15일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 광화문. 4년전 복원작업에 들어가기 전과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무엇보다 가장 큰 차이점은 기존 광화문은 콘트리트였던 데 반해 이번에는 목조로 복원했다는 것.

1968년 박정희 대통령 시절, 당시 광화문은 온전한 모습이 아니었다. 사라진 목조 부분만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다시 세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광화문은 이번 복원 작업을 통해 도성(都城)의 정문이었던 숭례문과 함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목조 건축물로서 새롭게 태어났다.

광화문의 새 현판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1968년 콘크리트 복원 당시에는 광화문 현판의 원래 모습을 알 수가 없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을 기초로 만들었다.

하지만 새 현판은 1900년대 초 유리원판 사진을 디지털로 복원해 제작했다. 고종 때 공사책임자였던 훈련대장 겸 영건도감제조 임태영(任泰瑛)의 글씨다.

각자장(刻字匠·중요무형문화재 106호) 오옥진 선생이 글씨를 새겼고 단청 채색은 단청장(丹靑匠·서울시무형문화재 31호) 양용호 선생이 맡았다.

위치도 바로 잡았다. 복원된 광화문은 기존 위치에서 남쪽으로 11.2m, 서쪽으로 13.5m 떨어진 곳에 세워졌다.

각도도 경복궁 중심축을 기준으로 3.75˚ 비틀어져 있던 것을 바로 잡았다.

이에 따라 광화문은 근정전-근정문-흥례문으로 이어지는 경복궁의 주요 전각·문과 평행을 이루게 됐다. 실제로 광화문 광장에 서서 광화문을 바라보면 문 사이로 흥례문의 모습이 정면으로 보인다.

지붕과 처마를 떠받치는 서까래(椽木)도 바로 잡았다. 1968년 복원 당시 15cm였던 서까래를 21cm로 고쳤다. 서까래 크기가 커지면서 문루(門樓)도 훨씬 더 안정감 있고 튼튼한 모습을 갖추게 됐다.

이밖에도 복원된 광화문은 아래 석축에 아치형의 홍예문(虹霓門)이 셋이나 자리잡고 있어 미적 가치도 뛰어나다. 이는 건축사에서 드문 형태로 그 모습이 매우 아름답다.

붉은빛으로 칠해진 문을 열면 천정에는 봉황과 현무, 기린이 그 자태를 뽐낸다. 세 문 중에서 가운데 문은 과거 임금만 드나들 수 있었던 문이다.

광화문 앞뒷면에 있는 빗물받이도 용머리와 연꽃 모양으로 만들어져 멋과 운치를 더했다. 담장에는 해, 달과 8괘를 그려놨다.

명품은 또 있다. 멋스럽게 빠진 광화문 문루의 처마는 서까래가 굵어지면서 전보더 더 자연스러우면서도 아름답다.

화재를 막아준다는 속설을 지닌 취두(鷲頭)도 상징적 의미가 크다. 취두는 화재를 막고자 궁궐이나 전각 지붕위에 놓은 장식물인데, 광화문 해체 공사 때 가장 먼저 조심스럽게 해체 했다. 두 번이나 소실된 광화문의 슬픈 역사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홍예문을 지나면 좌우의 동·서수문장청, 용성문, 협생문, 영군직소 등 복원된 부속 건물 5개 동도 볼 수 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현재 고종 당시 500여 동에 이르던 경복궁 내 건물 가운데 125동의 복원이 끝났다"며 "앞으로 20년간 진행할 2차 복원사업을 통해 고종 당시 76% 수준까지 복원하겠다"고 말했다. 

miholee@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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