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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대 동국제강 상무
휴일 날 무심코 FM라디오 방송을 틀었다. ‘안소니 퀸’의 바리톤 음색이 거실에 천천히 깔렸다. 마치 나비가 내려앉는 것 같았다.
“꿈은 어디로 가든 놓치지 마라”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어려움을 당할 거에요”(어린 아이, 찰리)
이 대목에서 울컥했다. 이처럼 진한 정을 나눌 수 있는 대상은 이미 세상에 없다. 문득 현관으로 눈길이 돌려졌다. 온다고 약속한 이는 없지만, 내심 장가든 아들 내외가 불쑥 찾아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안소니 퀸의 ‘살아보면 알거야(Life itself will Let you Know)’의 노랫말은 석양 노을의 끝자락 같은 여운을 남겼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잘 안다. 그냥 눈빛으로도 잘 안다. 그러나 아버지라는 ‘넘을 수 없는 벽’도 있다. ‘살아보면 알거야’는 우리의 커맨딩 하이츠(국가기간산업 업종)와 비슷하다. 대부분 2세대를 넘은 장수 기업들이다. 아버지로부터 혹독한 경영 수업을 받고, 생존을 위해 혁신과 도전을 지속했다.
유에서 무를 창조한 전설적인 기업, 국가를 위해 희생적이었던 기업, 망한다고 다들 말렸을 때 대차게 밀어붙여 성공가도를 달렸던 기업들, 국가기간산업의 역할과 국민의 주린 배를 든든히 채워주었던 기업들이 지금은 찬밥 신세가 됐다.
국가사회를 위하는 것이 기업의 성장발전과 괘를 같이 한다는 창업정신도 묻혀 버렸다. 글로벌을 지향했던 세계경영의 깃발도 찢겨진 느낌이다. 과거의 영광을 만들어낸 선배들의 월계관마저 내동댕이친 꼴이 됐다. 엄청난 부채 때문에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금융권은 하나도 없지만 이 기업들이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의 절벽에서 떨어질까 걱정스럽다.
스웨덴 금융투자회사 발렌베리는 위대한 기업으로 손꼽힌다. 이 기업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사고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경영이념을 갖고 있다. 스웨덴 철강노조위원장도 “발렌베리의 장기적인 자본 투자 운영은 존경 받기에 충분하다”고 칭찬한다. 발렌베리가 단기 투자에 치중했다면 아마 스웨덴을 대표하는 철강기업 사브(SSAB)도 없었을 것이란 이야기도 회자된다.
사브는 지금, 세계 50여 개국에 생산, 가공, 판매 법인을 가진 막강 기업이다. 포스코도 사브와 함께 글로벌 판매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오래전, 철강왕 카네기는 기업의 경쟁력은 품질이 좌우한다고 강조했다. 아무리 극한 경쟁체제가 이어진다고 해도 큰 성공은 가격이 아니라 품질이라고 했다. 구조조정의 칼날 위에 서있는 기업들이 과연 품질경쟁에서 밀리고 있는지 가려야 한다는 말이다.
세계 경쟁력 1위의 조선산업, 그리고 해운산업과 철강산업은 국가 대표선수로 충분하다. 기술경쟁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중요한 것은 용접과 금속가공, 화학, 도금, 조립, 가공 등 그 밑을 받치고 있는 뿌리산업의 생존이 달려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구조조정의 본질은 폭넓은 시각과 기업회생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기업을 이끌어 왔던 CEO들의 태도는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창업 1세대들의 ‘창업정신’이 살아 있는 기업들은 이미 회생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지만, 주인 없는 기업들의 행태는 차마 눈 뜨고 보기가 낯부끄럽다.
검찰이 나서서 전직 전문경영인들을 줄줄이 소환하는 볼썽사나운 꼴은 재현돼서는 안된다. 임기 중에만 잘하면 된다는 월급쟁이 근성은 마땅히 버려야 한다. 주인의식이 결여된 산업 현장은 늘 검은 그림자를 짙게 드리워 왔다. 몇몇 사람들의 호주머니와 주변을 배불리고 기업은 만신창이가 됐다.
이제라도 부채로 얼룩진 숫자의 원인은 철저히 제거해야 한다. 다만, 독일 잠수함의 도시 ‘킬 조선소’ 일대를 한숨으로 바꾸었던 한국인의 뛰어난 기술력은 살려야 한다.
솔로몬의 칼자루에 새겨진 ‘이 또한 지나 갈 것이니’처럼, 불황의 그림자도 걷힐 것이다. 더 많은 청년들이 꿈을 펼칠 수 있는 마당을 만들어 주는 것이 오늘의 아버지들이 할 일이다. “내일이란 우리의 소망을 들어주는 신화속의 우물 같은 것, 매일 순간순간을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안소니 퀸’의 끝 소절이 가슴에 절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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