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아인슈타인 박사가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 시절에 양자역학 과목 기말고사 시험문제를 전년과 똑같이 출제하여 대학 내에서 물의가 빚어졌다. 학장이 달려와 무성의를 질책하자 아인슈타인 박사는 ‘문제는 같아도 학생들의 답안은 달라야 한다. 양자역학이 매년 발전하고 있으니 작년 답이 올해 정답이 될 수 없다’라고 답했다 한다. 학문도 매년 발전하지만 요즘 국제정세는 더욱 급변하고 있어 늘 있던 문제이지만 똑같은 정책으로 대응해서는 효과를 볼 수 없을 지경이다. 그만큼 국제정세는 살아있는 생물과 같아서 계속 변화를 주시하며 이 생물을 잡을 새 궁리를 내놓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 외교·안보의 최대 위협인 북핵문제와 관련해서 우리의 대응과 인식은 과거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닌가 걱정이 앞선다.
2017년 북한은 추정 사거리 1만2000㎞ 수준으로 미국 서부까지 도달이 가능한 신형 대륙간 탄도미사일 화성 14형을 시험 발사했다. 올해 들어 북한이 쏘아 올린 각종 미사일 중에는 미국의 동부지역, 즉 뉴욕과 워싱턴까지 타격이 가능한 화성-15와 17도 포함되었다. 그리고 조만간 예고된 핵실험을 하게 되면 북한의 핵능력은 한층 강화될 것이다.
이처럼 북한이 연속적으로 다양한 종류의 미사일을 발사하는 데 소요되는 비용이 최소 연 6억 달러는 될 것이라는 것이 국제연구소의 추정이다. 북한이 사상 최강의 제재에다 코로나로 인한 국경봉쇄로 중국과의 교역도 단절된 상태에서 이런 막대한 비용이 드는 핵과 미사일 불꽃놀이를 계속하는 재원은 어디서 나오며 그 의도는 무엇인지 의아한 일이다. 북한이 온 국력을 집중하여 이런 무력 과시와 실험에 집중하는 이유를 따져보면 다음과 같은 추론이 가능하다.
첫째 북한은 바이든 미 행정부와 윤석열 정부에 대한 심리적 압박을 통해 향후 있을 협상 국면에서 우위를 점하려고 포석하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핵과 미사일 개발을 완료했으므로 협상을 지체할 이유는 없으나 단지 몸값을 올린 다음 상대가 다급한 상황을 이용하려는 전략에서 이런 행보를 보이는 것이다.
둘째 북한은 핵무기를 더욱 소형화, 다품종화하고 투발수단도 다양화하기 위해 필요한 실험은 어느 정도 더 진행할 필요가 있다고 보인다. 핵무기와 투발수단의 다양화가 이루어진다면 북한이 2차 보복타격 능력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북한은 핵과 미사일의 소형화, 다품종화 과정을 거쳐 이제 마지막 단계인 실전배치 단계로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전술·전략 핵무기를 남한과 미국을 향해 실전배치 하려고 마지막 점검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정말 우려스러운 것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밝힌 ‘핵 선제사용 독트린’이다. 지난 4·10 창군 90주년 기념 열병식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북한의 근본이익이 침탈될 때 핵을 선제사용 할 수 있다”라고 천명했다. 지난 30년간 북한이 핵을 개발하면서 처음에는 핵이 협상용이라고 하며 자기들의 요구조건이 받아들여지면 핵개발을 포기할 수 있는 것처럼 포장했다. 그 이후 북한은 핵을 미국의 침략위협에 대한 자위용이라고 둘러댔다. 그래서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평화협정을 통해 북한의 안보불안이 해소되면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선제사용 독트린’ 발표로 인해 드디어 북한 핵무기는 공격용으로 돌변하였고 우리의 안보는 이제 무서운 악몽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그간 북한의 온갖 위협적 언사를 겪다 보니 북한의 핵 공갈에도 둔감하다. 아직도 ‘핵은 민족공동 자산’이라거나 ‘동족에게 사용할 생각이 없다’라는 북한의 선전·선동에 현혹되는 분위기가 있어 우려스럽다. 그러나 북한의 핵 선제사용 독트린은 매우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가장 큰 이유는 북한이 미국의 핵우산을 저지할 수단을 가졌기 때문이다. 북한이 재래식 무기로 공격하거나 전술핵을 사용한 협박을 할 때 한국이 버틸 수 있으려면 미국의 핵우산에 의존해야 한다. 그런데 미국 본토 타격이 가능한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로 인해 미국의 핵우산 신뢰성에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된다. 미국의 핵우산이 잘 작동하기를 믿고 싶지만 한·미 간에는 핵우산의 작동방식을 구체화하는 작업이 아직도 마무리되지 않고 있다. 이 문제는 지난 5월 한·미정상회담에서 합의한 ‘한미간의 확장억제 고위급협의회’ 가동을 통해서 풀어나가야 할 숙제로 여전히 남아있다. 그런데 북한은 ICBM 다량생산을 통해 2차 타격능력까지 갖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과연 ‘워싱턴과 뉴욕이 보복 핵공격을 받을 가능성을 감수하고 한국을 도와줄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된다. 프랑스는 드골 대통령 때 이 질문에 대한 확신이 없자 독자적인 핵무장의 길로 나갔다.
일각에는 설마 북한이 선제타격을 하면 한·미의 보복공격으로 자국이 궤멸할 것을 알면서 이를 감행하겠느냐는 낙관론도 있다. 그러나 김정은 위원장이 비대칭적 확전의 논리를 채택하여 핵을 제한적으로 선제사용 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위기 시 한·미가 북한을 선제타격하려 한다면 북한은 자신들이 먼저 핵을 사용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할 것이다. 즉, 핵 교범에서 나오는 ‘쓰거나 지거나(use-it or lose-it)’라는 딜레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다. 예컨대 북한이 한·미의 핵우산 작동부터 막기 위해서 미국의 전략자산과 증원군이 발진할 괌 기지를 먼저 타격할 것이다. 그리고 미국으로부터 보복공격에 직면하면 미국 동부 대도시를 ICBM으로 파괴하겠다는 '상호확증파괴(MAD)' 협박으로 나올 수도 있다. 평양은 뉴욕이나 워싱턴에 비해 핵공격에 대한 방어시설이 잘되어 있다. 이런 계산 하에 미국 대통령이 이러한 위험한 도박에 판돈을 걸 수 없다는 것을 미리 점치고 핵 선제사용 위협을 가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미국이 이런 도박에서 한발 물러선다면 북한에겐 핵위협을 통해 승리를 거두는 결과나 마찬가지다. 설사 핵으로 괌 기지까지 타격하지 않더라도 전술핵 사용의 위협을 가하면서 서해 5도에 대한 도발기습을 가할 때 미국이 핵우산을 펼쳐주지 않으면 우리의 대응방안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한반도 긴장이 고조되어 운명의 순간이 오면 북한이 선제타격을 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국제정치학의 합리적 비대칭적 게임이론의 결론이다. 우리 신정부는 이러한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그냥 북한의 협박에 대해 수사적인 대응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대응조치를 철저히 마련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 길은 아주 험난할 것이지만 북한의 선제 핵사용 독트린 앞에서 나라와 국민을 지키는 길에 드는 비용과 노력은 아무리 비싸도 기꺼이 지불해야 한다. 이런 각오를 가지고 우리의 갈 길을 가야 할 것이다.
이백순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독문학과 △주미얀마 대사 △국회의장 외교특임대사 △주호주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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