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치용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페르시아만의 파고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미 해군의 핵심 전력인 ‘USS 에이브러햄 링컨’ 항공모함 전단이 중동 해역에 진입하면서, 언제든 상대방을 타격할 수 있는 상황이다. 앞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이란 시위대를 향해 “우리가 그들을 구하러 갈 것이다(We will come to their rescue)”, “도움이 가고 있다(Help is on the way)” 등의 메시지로 이란 정권 압박 수위를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미국의 행보가 국제법 규범인 ‘보호책임(R2P, Responsibility to Protect)’ 프레임 안으로 진입했다고 분석한다. 과연 그럴까.
트럼프의 ‘구출(rescue)’ 선언과 무관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별개로 SNS를 통해 확산한 이란의 젊은 여성이 최고 지도자의 초상화에 불을 붙여 담뱃불을 붙이는 장면은 현지 민심의 임계점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것이 AI로 생성된 가짜 영상이라는 얘기가 있다. 그렇다 할지라도 대중이 느끼는 분노는 진짜다. 물 부족으로 생존을 위협받는 농민들의 시위가 빈번해지고, 도심의 지반이 무너져 내리는 일상에서 정권의 정당성은 수자원 정책의 실패와 함께 이미 증발하고 말았다.
오늘날 국제사회의 R2P는 트럼프의 화려한 수사 뒤에서 길을 잃은 느낌이다. 그것은 이란의 말라버린 대수층 위에서 신음하고, 베네수엘라의 끈적이는 중질유 속에서 민낯을 드러내며, 리비아의 진흙탕 속에 매몰되어 있다. ‘보호’가 약탈의 분식이 되고, ‘보호자’가 곧 ‘가해자’가 된 트럼프 시대의 역설이다.
이란 혁명수비대의 ‘댐 마피아’가 훔친 생명수
이란의 수자원 파산은 부패한 군산복합체인 혁명수비대(IRGC)와 무능한 정책이 빚어낸 구조적 인재(人災)다. 이란 수자원 위기의 핵심은 IRGC 주도의 무분별한 토목 사업이라는 거대한 이권 사슬에 있다. 1988년 이란-이라크 전쟁 종료 후, 정권은 군대의 동요를 막고 전후 복구를 가속하기 위해 IRGC에 대규모 토목 사업권을 부여했다. 그 중심인 하탐 알-안비야(Khatam al-Anbiya) 건설 본부는 현재 4만명 이상의 정규직을 거느린 중동 최대 건설사로 성장하여 국가 경제의 20~40%를 지배하고 있다.
이 ‘댐 마피아’가 대규모 댐 건설에 집착한 이유는 예산 확보가 쉽고 빼먹기가 용이하기 때문이다. 환경적 타당성은 애초에 염두에 두지 않았다. 이란 내에 건설된 600~800개의 댐은 자연적 물길을 차단하여 습지를 고갈하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40~50℃를 넘나드는 고온 건조한 이란의 기후에서 물을 댐에 가두면 수표 면적이 넓어져 자연 상태보다 훨씬 많은 양이 증발한다. 전문가들은 댐에 갇힌 물 중 연간 약 20억m³ 이상이 사용되기도 전에 증발한다고 분석한다. 이란 전체 가용 수자원의 상당 부분이 이렇게 허망하게 소멸하고 있다.
공공연한 부패와 더불어 3000년을 이어온 이란의 지속가능한 지하수로 ‘카나트(Qanat)’의 파괴는 수자원 위기를 심화했다. 무분별한 심정 개발로 지하수위가 카나트 수로보다 낮아지자 전통 방식은 무용지물이 되었고, 결국 지하수층의 영구적 고갈로 이어졌다. 과거 면적이 5200㎢에 달했던 우르미아 호수는 현재 90% 이상이 사라졌다. 수도 테헤란은 지하수 과다 추출로 연간 최대 25~30㎝씩 침하 중이다. 도시 인프라가 스스로 무너지는 ‘내륙형 붕괴’의 전형을 보여준다. 2025년 가을 강수량이 평년 대비 96% 폭락한 상황이고, 관개 효율이 35% 수준에 불과한 상태에서 농업 부문은 국가 전체 물의 90% 이상을 독점 사용한다.
이처럼 이란 국민이 국가 권력의 부패와 정책 실패로 생존권을 박탈당하고 있음에도 미국은 R2P의 수사를 늘어놓을 뿐 실제 개입을 망설인다. “도움이 가고 있다”는 엄포와 달리 트럼프는 지정학적 이익과 이스라엘의 군사적 상황을 검토하며 이란 국민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 있다. ‘보호’의 대상이 이란 국민이나 인류 보편의 가치가 아니라 철저히 미국의 전략적 타산에 따라 선별되고 있기 때문이다.
베네수엘라에서 보인 ‘석유 산업’을 위한 노골적 R2P
이란에서 망설이는 미국의 ‘보호’ 욕구는 앞서 베네수엘라에서 기괴한 방식으로 폭발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주권을 무시하면서까지 베네수엘라 정권 전복에 집착한 이유는 인도주의적 배려에서가 아니다. 미국의 정유 산업을 지탱하는 ‘초중질유의 경제학’ 때문이다.
미국은 세계 1위의 원유 생산국이지만, 셰일 혁명으로 생산되는 자국 내 ‘경질유’만으로는 걸프 연안의 고도화한 정유 설비를 효율적으로 가동할 수 없다. 미국의 정유 공장들은 끈적거리고 불순물이 많은 중질유를 정제하여 디젤과 항공유를 만들어내는 ‘코커(Coker)’ 설비에 특화해 있다. 이 설비가 유휴 상태가 되면 정제 마진이 하락하기 때문에, 미국은 자국산 경질유와 섞을 저렴한 중질유를 끊임없이 수입해야 한다.
베네수엘라의 ‘메레이-16(Merey-16)’ 원유는 '타르' 수준의 초중질유인 데다 제재 등의 이유로 국제유가보다 저렴하다. 트럼프에게 베네수엘라는 다른 R2P의 대상이다. 유엔 등의 결의안에 R2P의 ‘Protect’의 목적어는 거주민(Populations)이나, 베네수엘라에선 석유(Petroleum)이다. 미국 내 인플레이션을 방어하고 정유사의 마진을 극대화할 ‘저가 원료 공급지’를 장악하기 위해 전격적으로 들어갔다. 베네수엘라를 미국 경제권 내로 편입함으로써 중국의 독립 정유사(티팟)들이 헐값에 가져가던 독점 프리미엄을 박탈하고, 미국의 앞마당에서 러시아와 중국의 영향력을 제거하겠다는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이것이 아마 트럼프 시대의 가장 솔직한 ‘R2P’일 것이다. 보호 대상은 베네수엘라 국민이 아니라 미국의 석유 산업과 미국 소비자의 가처분 소득이다. 주권을 무시하고 대통령을 제거하는 시도의 알맹이는 철저히 에너지 기반의 약탈적 질서 재편에 있다. 명분에 구애받지 않고 체면을 차리지 않는 마피아 제국주의적 ‘보호’의 진면목이다.
R2P가 파괴한 국가 리비아의 진흙탕 유산
베네수엘라에서 시도한 정권 전복의 선행 사례는 리비아다. 2011년, 유엔 안보리 결의 1973호에 근거한 최초의 군사적 R2P 개입은 카다피의 폭정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걸었다. 결과적으로 리비아에서 R2P는 R2P를 영구적으로 침해했다.
미국이 주도한 NATO의 폭격으로 카다피 정권이 붕괴했고, 이후 리비아는 10년 넘게 정치적 공백과 내전에 시달렸다. 동부의 군벌(LNA)과 서부의 과도정부(GNU)로 나뉜 국가는 핵심 인프라 관리를 방기했다. 2023년 9월 사이클론 대니얼이 몰고 온 폭우로 데르나의 두 댐이 붕괴하며 1만명 이상이 사망한 참사는 12년 전 ‘보호’를 명분으로 국가 기능을 마비시킨 국제사회의 개입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무너진 댐들은 1970년대에 건설된 이후 2002년부터 단 한 번도 보수되지 않았다. 2021년 감사 보고서에 따르면 보수 예산이 배정되었음에도 실제 공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댐이 위치한 데르나는 이슬람국가(IS)의 지배를 거쳐 현재 군벌이 장악한 무법지대였다. 장기적인 국가 재건 계획 없는 국제사회의 개입은 국민국가의 기능을 무력화함으로써, 결국 국민을 기후 위기라는 더 거대한 재앙 앞에 무방비로 노출시켰다. 리비아의 비극은 ‘보호’라는 이름의 개입이 남긴 가장 참혹한 후유증이다.
2026년 1월의 미네소타
R2P의 도덕적 파산은 미국의 심장부에서 완성된다. 2026년 1월, 트럼프 행정부의 ‘오퍼레이션 메트로 서지(Operation Metro Surge)’가 강행된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연방 요원(ICE)의 총격으로 미국 시민 두 명이 잇따라 목숨을 잃었다. 지난 7일 37세 여성 르네 굿이 자신의 차 안에서 사살당한 데 이어 불과 2주 뒤인 24일에 보훈병원 간호사 알렉스 프레티가 시위 현장에서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미국 국가 권력에 의한 연이은 살인은 미국이 타국에 대고 외치는 “Rescue”가 얼마나 가증스러운 위선인지를 고발한다. 2020년 전 세계를 분노케 한 조지 플로이드 사건의 데자뷔다. 무릎으로 목이 눌린 채 “숨을 쉴 수 없다”고 호소한 플로이드의 희생 이후에도, 시민을 향한 연방 공권력의 즉결 처형이 자행되고 있다.
자국민의 생명조차 보호하지 못하는, 오히려 자국민을 내부의 적으로 규정하고 사살하는 지도자가 이란 시위대의 인권을 걱정하며 “구출”을 운운하는 게 기이하다. R2P는 더 이상 보편적인 국제 규범으로 설 자리를 잃었다. 보호받아야 할 주체(미국 시민)가 미국 국가 권력의 직접적인 위협을 받을 때 R2P의 원칙에 따라 국제사회가 미니애폴리스에 개입해야 할까.
이제 R2P는 낯설게 재해석되어야 한다. 리비아의 비극적 후유증, 이란의 부패한 수자원 독점, 베네수엘라의 약탈적 석유 전략, 그리고 미니애폴리스의 피 묻은 거리는 우리에게 ‘보호’의 주체가 누구여야 하는지를 묻게 한다. 국가가 국민을 지키지 못하는 수준을 넘어, 국가가 자국민을 살상하고 타국의 자원을 약탈하며 기후 위기라는 공동의 재앙 앞에 국민을 방치하는 시대다.
명목으로라도 대의와 인류애가 사라진 국제 정치판에서 기존의 R2P는 휴지조각이 되었다. 이제 R2P는 국민이 국가로부터 정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생존권을 보호할 책임으로 재정의되어야 할 상황인 것 같기도 하다. 사실상 R2P의 종언이다.
이란의 시민들이 민주주의의 권리를 주장하고, 미국의 시민들이 공권력의 폭력에 저항할 때 새로운 R2P가 시작된다. 모든 원칙과 규범이 무너진 약탈적 세계 질서의 시대에 우리는 누가 진짜 보호받아야 하는지 누가 보호해야 하는 주체인지를 끊임없이 묻고 행동해야 한다. 국가가 아닌 시민의 책임이 더 무거워진 시대가 도래했다.
안치용 필자 주요 이력
△ESG연구소 소장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전 경향신문 사회책임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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