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설랑(雪浪) 조완규 총장님을 추모하며 

  • 박상철 국제백신연구소 한국후원회장 추도문

 
박상철 국제백신연구소 한국후원회장 사진아주경제
박상철 국제백신연구소 한국후원회장. [사진=아주경제]
                                             

존경하고 사랑하는 설랑(雪浪) 조완규 총장님 영전에, 삼가 머리 숙여 이 글을 올립니다. 지난 칠월 십삼일 새벽, 아흔여덟 해의 뜨겁고도 정갈했던 한 생을 마치고 총장님께서 우리 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저희는 도무지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후배들의 안부를 물으시고, 세계 백신 동향을 살피시며 원고를 다듬으시던 모습이 선합니다. 그리고 제 방에 들어서시면서 “아직도 바쁜가?”하고 물으시던 모습이 눈앞에 선합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서리풀공원을 걸으시고, 하루에도 몇 개씩 이어지는 모임을 한 번도 빠짐없이 지키시던 그 정정하신 걸음걸이가, 저희의 기억 속에는 아직도 또렷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 이별은, 너무도 갑작스럽고 믿을 수가 없고 너무도 아득합니다.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 이 자리에, 총장님과 함께 일하고 배웠던 수많은 이들이 모였습니다. 흰 국화 향기 가득한 이 빈소에는 총장님의 강의를 들었던 백발의 제자들도 있고, 국제백신연구소의 첫 삽을 뜨던 동료들도 있으며, 밤새 달려온 조문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저마다 다른 시절, 다른 자리에서 총장님을 만났지만, 이 자리에 모인 모두의 마음은 하나입니다. 대한민국 과학기술계와 교육계의 크나큰 별 하나가, 그리고 무엇보다 따뜻한 사람 한 분이 우리 곁을 떠나셨다는 사실 앞에서, 저희는 그저 고개를 깊이 숙이고 슬픔과 그리움을 가눌 길이 없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총장님께서는 1928년, 아직 나라를 되찾지 못했던 그 어두운 시절 황해도 재령의 한 마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대전고등학교를 마치시고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생물학과에 진학하시던 무렵, 이 땅은 전쟁의 포화가 휩쓸고 지나간 폐허와 다름없었습니다. 제대로 된 실험실 하나, 변변한 기자재 하나 갖추기 어려웠던 그 척박한 시절, 총장님께서는 연필 한 자루와 종이 몇 장만으로 학문의 첫걸음을 떼셨습니다. 한국인의 출생 성비를 끈질기게 추적하시어 여아 백 명에 남아 백십 명이라는 사실을 밝혀내고, 이를 국제학술지에 발표하신 그 첫 논문은, 아무것도 없는 땅에서 맨손으로 세계 학계를 두드리신 개척자 정신의 시작이었습니다. 이후 포유동물 난자 성숙 과정을 조절하는 핵심 기전을 규명하시고, 난자와 배아를 안전하게 운반할 수 있는 독창적인 배양법을 개발하시며, 이 땅에 발생생물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의 뿌리를 처음으로 내리셨습니다. 총장님의 아호를 따 ‘설랑 문하생’이라 불리는 제자들은 오늘도 국내외 곳곳에서 생명학 연구를 이끌고 있으며, 총장님께서 남기신 학문의 뿌리가 얼마나 깊고 넓은지, 저희는 새삼 헤아리게 됩니다. 

1975년 관악 캠퍼스로 자연과학대학이 옮겨올 때 초대 학장을 맡으시어, 기초과학 연구 중심 대학이라는 새로운 위상을 세우신 분 또한 총장님이셨습니다. 강의실에서의 총장님은 엄격하면서도 자상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엄정함 속에서 학문의 자세를, 그 다정함 속에서 사람을 대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후 부총장, 총장, 장관, 그리고 한 시대의 과학행정가로서 총장님께서 걸어오신 길은, 우리 과학기술이 폐허에서 일어서는 여정과 정확히 포개어집니다. 

총장님을 추모하며 저희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모습은, 낡은 제도와 굳은 관습 앞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으셨던 그 형형한 눈빛입니다. 1987년, 온 나라가 민주화의 열기로 들끓던 시절 제18대 서울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하시어, 학칙에 남아 있던 정치활동 금지 조항을 과감히 삭제하셨습니다. 징계로 학교를 떠나 있던 학생 천여 명에게 다시 배움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대학은 마땅히 자율의 공간이어야 한다는 신념을, 취임 첫해부터 온몸으로 실천해 보이신 것입니다 당시 서울대학교가 마련한 ‘자율학칙’을 정부가 석 달 넘게 승인하지 않자, 총장님께서는 학칙을 승인하지 않는다면 총장직을 내려놓겠다고 통고하셨습니다. 대학의 자율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자리를 조금도 아끼지 않으셨던 그 결기 앞에, 결국 당국도 자율학칙을 승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총장보다 무거운 것은 대학이 스스로 서는 원칙이며, 한 사람의 거취보다 중요한 것은 다음 세대가 자유롭게 배우고 연구할 수 있는 터전이라는 것을, 총장님께서는 그렇게 몸소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총장님의 위대함은 낡은 것을 허무는 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허문 자리에는 언제나 새로운 것을 세우셨습니다. 생소하던 유전공학의 미래를 내다보시고 ‘유전공학육성법’ 제정을 주도하여 전문 인력을 길러내고 연구비를 지원할 법적 토대를 처음으로 마련하셨고, 한국바이오산업협회를 창립하시어 실험실의 지식이 산업의 힘으로 이어질 길을 여셨습니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의 초대 원장으로서 국제 교류의 틀을 세우시고, 광주과학기술원 설립위원장과 초대 이사장으로서 지방에도 세계적 수준의 연구중심대학이 자라날 씨앗을 심으셨습니다. 

이 모든 개혁과 창립의 밑바탕에는 한 가지 분명한 원칙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제도는 사람이 더 나은 연구를 하고 더 나은 삶을 살도록 돕는 도구여야 한다는 원칙이었습니다. 유전공학육성법을 만드실 때에도 관료의 편의가 아니라 밤을 새우는 젊은 연구자의 처지를 먼저 헤아리셨고, 대학의 연구 성과가 서랍 속에 잠들지 않고 국민의 삶을 바꾸는 힘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총장님께서 만드신 법과 제도와 조직은 시대가 몇 번 바뀌어도 낡지 않고, 오늘도 우리 과학기술을 떠받치는 튼튼한 기둥으로 남아 있습니다. 

총장님의 생애를 돌이켜 보면, 혁파의 용기와 실천적 추진력, 후배와 이웃을 자식처럼 품어 안으신 포용, 하루도 거르지 않으셨던 근면함이 서로 다른 네 가지 모습처럼 보이지만 실은 한 뿌리에서 나온 네 개의 가지였습니다. 그 뿌리는 사람을 향한 진심이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소박하게, 그러나 세상을 위해서는 누구보다 뜨겁게 사셨던 한 생애가 바로 총장님의 삶이었습니다. 

총장님을 가까이에서 뵈었던 이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총장님이 들고 있는 수첩에는 늘 다음 주, 다음 달, 내년의 일정이 빽빽이 적혀 있음을 보면서 모두들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흔을 넘긴 어른의 수첩이라기 보다는 이제 막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청년의 수첩이었습니다. 서리풀공원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걸으시며 하루 만 보 이상을 채우고, 하루에도 서너 개에서 다섯 개의 모임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참석하시던 그 부지런함 앞에서, 우리는 오히려 젊은 우리가 부끄러워질 때가 많았습니다.
 
어느날 제가 선생님께 살아오신 과정에 지켜오신 가장 중요한 삶의 원칙을 말씀 주시라고 하였더니 총장님께서는 “해야 할 일 하는 거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의 백년에 가까운 삶은 바로 이러한 마땅히 해야 할 일 하고 살았다는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끔 제가 운동 강도를 조금만 줄이시라고 말씀드리면, “이 정도는 할 만해” 하시며 미소를 지으시던 총장님의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맴돕니다. 그 말은 스스로에게 던지는 물음이자, 게으름을 용납하지 않는 한 학자의 다짐이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저에게 “여전히 바쁜가?” 하고 물으시던 그 짧은 한마디 속에는, 젊은 우리가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도전하며 더 부지런히 세상을 위해 움직이기를 바라시는 애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아흔여덟 해를 사시면서도 단 하루도 헛되이 흘려 보내지 않으셨던 총장님의 근면함이야말로, 저희에게 남겨 주신 가장 크고도 소박한 유산입니다. 

총장님께서는 생애 마지막까지 대한민국 과학자의 손으로 노벨상을 받는 날을 보고 싶다는 소망을 품고 계셨습니다. “젊은 과학자의 창의성과 능력, 의지와 추진력을 보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이들이 연구를 계속할 수만 있다면 삼십 년, 사십 년 후에는 분명 노벨과학상 수상 후보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그 소망을 두 눈으로 확인하지는 못하신 채 떠나셨지만, 총장님께서 강단과 한림원과 국제백신연구소와 수많은 학술단체에서 길러내신 후학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의 연구실에서 그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총장님께서 심으신 씨앗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총장님께서는 평생을 함께해 오신 사모님 홍성현 여사와 사랑하는 가족들 곁을 떠나, 먼 길을 나서십니다. 오랜 세월 총장님의 바쁜 걸음 뒤에서 묵묵히 가정을 지키고 지지해 주신 가족분들의 헌신과 기다림을 저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가장 깊은 슬픔 속에 계실 유가족 여러분께, 깊은 감사와 뜨거운 위로의 마음을 함께 올립니다. 

총장님께서 평생을 바쳐 이룩하신 학문의 성취와, 낡은 제도를 허물고 새 길을 여신 결기와 사람을 품어 안으신 넓은 마음과 하루하루를 정갈하게 채우신 근면함은,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저희 모두의 가슴 속에 오래오래 살아 숨 쉴 것입니다. 대한민국 과학기술계는 총장님을 기려 한국과학기술한림원장으로 오늘의 장례를 엄수하며, 총장님께서 걸어오신 그 길을 잊지 않고 이어가겠다고 이 자리에서 조용히 다짐합니다. 

총장님 존경합니다. 총장님 사랑합니다. 총장님, 이제 부디 모든 짐을 내려놓으시고 편히 쉬소서. 저희는 총장님께서 남기신 길과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고, 남은 생을 통해 그 뜻을 이어가겠습니다. 
                                                           
 
     2026년 7월16일 
   고 설랑(雪浪) 조완규 총장님을 추모하며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 3층 1호에 마련된 조완규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초대 원장 빈소 사진한국과학기술한림원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 3층 1호에 마련된 故 조완규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초대 원장 빈소. [사진=한국과학기술한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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