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원 논설위원장]
제3부. 경쟁을 넘어, 함께 세계를 설계할 시간
동경대 캠퍼스를 걸으며 필자가 떠올렸던 1990년대 초반의 모습은 이랬다. 당시 일본은 세계 제조업의 상징이었다. 미국은 정보통신 혁명의 출발점에 있었고, 한국은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해 쉼 없이 달리던 산업국가였다. 그 무렵 한국과 일본은 서로를 가장 강한 경쟁자로 인식했다. 더 좋은 반도체를 만들기 위해 경쟁했고, 더 많은 자동차를 팔기 위해 경쟁했으며, 더 높은 품질의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경쟁했다.
그 경쟁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한국은 세계 최고의 메모리 반도체와 디지털 제조 역량을 갖춘 나라로 성장했고, 일본은 정밀 제조와 소재·부품·장비, 산업용 로봇 분야에서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경쟁은 양국을 성장시켰고, 오늘의 산업 기반을 만들었다.그러나 AI 시대는 또 다른 질문을 던지고 있다. 경쟁만으로도 충분한가.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한국과 일본은 경쟁을 포기할 이유도 없지만, 협력을 미룰 이유는 더더욱 없다. 한국은 AI와 반도체, 디지털 전환과 실행력이 강하다. 일본은 정밀 제조와 로봇, 소재·부품·장비와 품질관리에서 독보적인 경쟁력을 갖고 있다. 양국이 가장 잘하는 분야는 서로 다르지만, 미래 산업이 요구하는 핵심 요소라는 점에서는 정확하게 맞닿아 있다.
그래서 필자는 '한일 AI 기술산업동맹'을 단순한 협력사업이 아니라 새로운 성장 모델로 바라본다. 이 동맹은 정치적 선언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대학과 연구소가 공동으로 연구하고, 기업이 함께 투자하며, 스타트업이 자유롭게 오가고, 표준과 특허를 공동으로 만들며, AI 인재가 국경을 넘나드는 생태계가 구축될 때 비로소 실체를 갖게 된다.
양국 정부가 추진할 과제도 분명하다. 첫째, '한일 AI 기술산업위원회'와 같은 상설 협의체를 만들어 반도체·AI·로봇·에너지·데이터센터를 아우르는 공동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둘째, 대학과 연구기관을 연결하는 '한일 AI 공동연구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한다. 필자가 다시 찾은 동경대와 한국의 주요 대학, 연구소들이 하나의 혁신 네트워크로 연결된다면 그 자체가 동북아 최대의 지식 생태계가 될 수 있다.
셋째, 기업 간 협력도 새로운 단계로 진화해야 한다. 공동 연구개발을 넘어 공동 투자와 공동 표준, 공동 브랜드 전략으로 확장해야 한다. AI Factory, 차세대 반도체, 휴머노이드 로봇, 자율주행, 양자기술은 이러한 협력이 가장 큰 효과를 낼 수 있는 분야들이다.
넷째, 협력의 무대는 처음부터 세계여야 한다. 아세안과 인도, 중동, 유럽, 미국을 함께 연결하는 글로벌 공급망과 시장 전략을 세울 때 비로소 한일 협력은 국제적 설득력을 갖는다.
이러한 협력은 어느 한 나라의 승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한국이 강해지고 일본이 약해지는 것도 아니며, 일본이 앞서고 한국이 뒤처지는 것도 아니다. AI 시대의 산업질서는 제로섬이 아니라 네트워크 경쟁이다. 연결이 많을수록 가치가 커지고, 협력이 깊을수록 혁신의 속도는 빨라진다.
동경대 중앙도서관 앞에서 시작된 필자의 생각은 결국 하나의 확신으로 이어졌다. 20세기 한일 관계의 키워드는 '추격'과 '경쟁'이었다. 21세기의 키워드는 '공동 설계(Co-design)'와 '공동 창조(Co-creation)'가 되어야 한다. AI 시대는 어느 한 나라가 홀로 미래를 독점하는 시대가 아니다. 서로 다른 강점을 연결하여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는 국가가 세계를 선도하게 될 것이다.
동경대를 뒤로하며 필자는 마지막으로 스스로에게 다시 질문을 던졌다. "한국과 일본이 손을 맞잡는다면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답은 생각보다 크다. 양국 산업의 미래만이 아니다.
아시아의 혁신 생태계를 바꾸고, 세계 공급망의 새로운 축을 만들며, AI 시대의 산업문명을 함께 설계할 수 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거를 잊는 용기가 아니다. 과거를 직시하면서도 미래를 함께 설계하는 지혜다. 경쟁은 양국을 강하게 만들었다. 이제 협력은 세계를 움직일 차례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 교수, 가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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