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소영의 우.다.세] 달라도 함께 살 수 있잖아요? -영화 '이반리 장만옥'

  • 중년, 레즈비언, 장애, 비장애…카테고리를 넘어선 인류애

▲ ‘다양성 영화’는 단순히 장르를 뜻하기보다 상업 중심의 주류 영화와는 다른 시선·형식·주제를 가진 영화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다양한 국적, 장르, 소수성 등을 포함하는 범주를 갖고 있다. 누군가는 불편하다며 외면했던 이야기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고 마주하는 역할을 기대해본다. '우'리들의 '다'양한 '세'상을 위해. ※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사진영화 이반리 장만옥 스틸컷
[사진=영화 '이반리 장만옥' 스틸컷]

몇 해 전 서울시청 앞에서 열리는 퀴어 퍼레이드를 본 적이 있다. 그들은 시청 앞 잔디 광장 안쪽에 무대를 만들고 관람객들에게 페이스페인팅이나 헤나 같은 그림을 그려주기도 하고 혹은 퀴어 관련 소품 및 책 등을 판매하며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었다. 이곳엔 성 소수자 단체를 비롯해 장애 및 노동자, 진보 색깔을 띈 정당의 깃발과 퀴어의 다양성을 뜻하는 무지개 깃발이 곳곳에서 펄럭이고 있었다. 

어딘가 들뜬 모습으로 환히 웃음을 지고 있던 그들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 시청 건너편 덕수궁 앞에선 퀴어 퍼레이드를 반대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이들의 행렬 사이로 울려 퍼졌지만 이들은 여전히 웃으며 행진을 이어갔다. 아무도 이들의 연대를, 사랑을 방해할 수 없다는 듯이.

영화 ‘이반리 장만옥’은 당시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 영화다. 완전한 퀴어 서사 안에 권력과 편견, 혐오가 있다. 더 촘촘히 들여다본다면 중년 레즈비언 만옥(양말복)의 외로움과 애환, 귀향의 과정 그리고 자신이 바라는 외로움이 없는 세상으로의 욕구가 반영돼 있다.

만옥은 서울에서 20년 된 연인 금자(김정영)와 함께 살며 퀴어 바 ‘레인보우’를 운영하고 있는 인물로, 한때 이 바는 서울 퀴어 문화의 중심지로 여기질 만 만큼 많은 퀴어들이 찾는 성지로 일컫어졌다. 그러나 세월 앞에서 장사가 없다는 말처럼 시간의 흐름 앞에 그 자리는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자신이 오랫동안 지켜온 공간과 그곳에서 쌓아온 관계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던 만옥은 자신이 더 이상 필요한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아무도 자신의 성 정체성을 인정해주지 않는 불모지의 땅에서 이들을 위해 앞장섰다고 생각하며 지금의 젊은 퀴어들이 누리는 변화 역시 자신이 버텨온 시간의 결과라고 생각했으나, 젊은 세대는 만옥의 세상을 인정하기보다 자신들이 머물기에 더 나은 곳으로 옮기기 바쁘다. 이젠 레인보우를 ‘구식’으로 바라보는 젊은 퀴어들을 향해 “너희 정도면 인생 편하게 사는 것”이라는 만옥의 자부심은 ‘꼰대’라는 이름 아래 세대간 갈등 원인으로 작용한다. 

그렇게 서울에서 설 자리를 잃어가던 만옥에게 어머니의 부고가 전해지고 그는 서울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고향인 이반리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의 귀향은 생각처럼 평온하지 않다. 이반리의 이장은 만옥의 전남편 철주로, 오래전 갈라선 두 사람 사이에는 불편한 감정이 남아 있다. 철주는 만옥의 성 정체성을 문제 삼으며 그의 정착을 막기 위해 사사건건 앞을 가로막는다.

만옥은 결국 철주의 독주를 막으려는 계획으로 자신이 이장 선거에 출마하기로 결심한다. 철주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이장직을 수행하는 인물이지만 재혼 뒤 낳은 자신의 딸 재연(성재운)의 정체성 혼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 아버지기도 하다.
 
사진영화 이반리 장만옥 스틸컷
[사진=영화 '이반리 장만옥' 스틸컷]

영화에서 트렌스젠더 고등학생 재연은 중요한 등장인물 중 한 명이다. 젊은 세대와의 갈등으로 고향으로 돌아온 만옥이 다시금 이들을 품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만옥은 퀴어의 삶을 살아온 인생 선배로서 재연에게 모두 돌을 던질 때 유일하게 그의 편에 서 싸울 줄 아는 사람이다. 재연 역시 이장직에 나서는 만옥을 도우며 아버지 철주의 편견 앞에 당당해진다.

급기야 철주는 마을 사람들과 만옥의 집으로 몰려가 만옥을 향해 자신의 딸을 물들게 했다며 “저거, 그거여 그거!”라며 그의 정체성을 아웃팅(본인이 아닌 타인에 의해 강제로 밝혀지는 것)해 버린다. 이로 인해 만옥과 사람들과의 갈등은 커지는 듯 보이나 만옥은 굴복하지 않는다. 그에게 꿈이 생겼기 때문. 모두가 외롭지 않은 동네를 만들어야겠다는 소명이 생긴 것이다.

이후 만옥은 특유의 기세와 소통 능력으로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 둘 얻는다. 그간 이장 눈치를 보며 살던 이웃들, 외로운 나날을 보내던 독거노인들을 찾아가고 만옥의 누구도 외롭지 않은 세상에 대한 꿈은 더욱 선명해진다.

만옥은 타인의 편견 앞에선 당당하지만 사람들을 품어내는 넉넉함을 지니고 있다. 그 모습은 인간을 세대, 인종, 성적 지향, 장애와 같은 여러 범주로 나누기 이전에 그저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본능에 가깝다. 누구인지 완벽하게 이해해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마을에 사는 사람으로 곁을 내어주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유머를 잃지 않는다. 만옥의 거침없는 말투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터져나오는 웃음은 ‘퀴어 영화는 대체로 어둡다’는 편견을 깨부순다. 퀴어의 삶에도 슬픔과 갈등, 실패, 화해, 즐거움 등 일상이 모두 존재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유쾌하게 보여준다.

영화 말미 시골인 이반리에서 열린 퀴어 퍼레이드에선 세대가 어울려 모두 흥에 겨워 춤을 추는 장면은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정점을 찍는다. 

우리 모두 이해하지 않아도 함께할 수 있는 마을. 만옥이 만들고 싶은 곳은 거창한 이상향이 아니다. 혼자 남겨진 사람 없이 누구나 자신이 머물 수 있는 자리가 있는 곳이다. 사람에 대한 꼬리표를 붙이기 이 전에 그저 한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곳 말이다. 다양함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함께 살아가는 이들과 음식을 나눠 먹으며 얘기할 수 있는 그 지점에서 출발하는 게 아닐까. 
 
사진영화 이반리 장만옥 스틸컷
[사진=영화 '이반리 장만옥'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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