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태 한국은행 총재가 전날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 출석한 자리에서 한국경제의 최대 어려움으로 '가계부채'를 지목하면서 새해 벽두 또다른 관심꺼리로 등장하고 있다.
정부는 일단 겉으로는 말을 아끼고 있지만 내심 발언이 미칠 파장에 대해서 노심초사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앞서 가계부채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부동산 시장이 들썩이지 않도록 LTV(주택담보대출인정비율)와 DTI(총부채상환비율)에 대한 추가적인 규제까지도 염두에 두겠다는 방침을 밝힌 바 있어 드러내놓고 불만을 표출하기는 어려운 형국이다.
한은 역시 총액대출한도 규제 등을 통해 시중에 풀린 유동성을 회수할 뜻을 내비치는등 금융기관의 대출자격 조건 심사 강화라는 공감대에 무게가 실린 형국이지만 일각에서 조기 출구전략 시행쪽으로 논의가 급진전되는 것 아니냐는 전망도 나오고 있어 주목된다.
◆ "출구전략 없다"던 정부 내심 못마땅
정부는 퇴임을 1달여 앞둔 이 총재가 가계부채 문제를 거론한 데 대해 표면적으로는 특별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지만 내심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하다.
아직까지 경기회복이 본격화하지 않은 시점에서 내부악재가 하나 더 늘어나는 데 대한 부담이 적지 않다. 지난해 두바이 채무불이행으로부터 촉발된 세계경제의 불확실성이 연초 중국의 긴축움직임, 미국의 금융규제안, 유럽발 재정위기 등 악재가 끊임없이 돌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윤증현 재정부 장관은 최근 기자단과의 취임 1주년 만찬을 통해 "지나친 낙관론도 안되지만 우리 경제에 대한 지나친 비관론은 스스로의 발등을 찍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같은 이유로 정부는 전날 국회에 보고한 업무보고를 통해 당분간 확장적 금융기조가 유지돼야 한다고 말해 한은에 불편한 심기를 우회적으로 내비친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최근 중국의 유동성 회수 움직임과 일부 국가의 기준금리 인상과도 맥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이란 견해도 있다. 중국 정부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초저금리 양상을 지속하면서 가계부채 증가속도를 낮추기 위한 작업에 돌입했기 때문.
임경묵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이 총재의 발언은 건전성 측면에서 가계부채가 많은 부담이 된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고 말했다.
이 총재의 '조기 출구전략 시행' 발언이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야당은 물론 여당 일부 의원들조차 이에 동조하고 나서는 모양새를 보였다.
박종근 한나라당 의원은 "각국마다 사정이 다른 데 출구전략 공조가 되겠냐"면서 "G20 회의 전이라도 정부가 출구전략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가계부채 대체 어느 수준이길래
정부와 한은이 이처럼 미묘한 신경전을 펼치고 있는 가운데 실제 가계부채 산정 방식을 놓고도 견해차가 나오고 있다.
한은은 최근 자료에서 지난해 9월말 현재 명목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의 비율이 사상 최고수준인 70%에 육박하고 있다.
가계신용(가계대출+판매신용)은 712조7971억원이었던 반면 총처분가능소득은 1043조1988억원으로 2008년 같은 기간 1027조5897억원보다 1.5% 늘어나는 데 그쳤다. 이 증가율은 환란당시인 1999년 6월말(-0.5%) 이후 가장 낮은 수치다.
최석원 삼성증권 채권분석팀장은 "우리나라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의 부채를 합쳤을 때 규모가 GDP의 330% 정도다. 미국이 300%가 좀 안되는 것으로 규모로 보면 상당수준"이라고 우려했다.
반면 이근태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지난 7일 '가계부채 위험한가'라는 보고서에서 우리나라의 가계부채 규모와 상환능력은 다른 나라들의 평균 수준이다"고 말해 상반된 입장을 견지했다.
이 연구위원은 "자산 가치가 부채의 3.5배고 주택 매매지수와 전세지수를 비교할 때 거품도 그다지 크지 않아 대규모 상환불능 사태가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가계부채 문제가 금융위기로 확산되거나 소비의 급격한 위축으로 이어지는 등 우리 경제 전반에 심각한 타격을 줄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설명했다.
그는 "현재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가계부채와 관련해 금융기관들의 과도한 자산 확대 우려는 크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며 "국내은행의 평균 주택담보인정비율(LTV)은 50%를 밑돌아 가계가 대출을 상환하지 않더라도 담보처분을 통해 손실을 보전할 수 있다"고 전했다.
◆ 금리인상→가계부담 상승 우려도
이런 가운데 금융기관이 초저금리를 활용해 무리한 대출경쟁에 나선 것도 가계부채를 키운 원인이라는 질타도 나오고 있다.
이에따라 조기 금리인상을 단행할 경우 오히려 주택담보대출 이자부담만 늘어 결국 돈을 빌려 주택을 구입한 서민들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부정론도 적지 않게 제기되고 있다.
안효대 한나라당 의원은 "금융기관이 지난해 엄청난 규모의 수익을 거두었다"며 "상당부분이 변동금리부 대출로 만들어진 주택담보대출 때문이었다"고 지적했다.
가계부채 해결을 위해서는 가급적 충격을 줄이는 쪽으로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안순권 한국경제연구원(KERI) 연구위원은 "각 가정마다 부채구조조정이 필요하지만 이문제를 가장 효율적으로 풀기위해선 가계에 책임을 전가하기 보단 고용 불안 문제의 개선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근태 연구위원은 "변동금리 대출비중이 높고 주택담보대출 원리금 상환 만기가 올해 상반기에 집중돼 있는 점은 부담을 확대시키는 요인"이라며 "스트레스테스트 등을 통해 금융회사들의 건전성을 감독하고 가계부채와 관련된 미시적 통계들을 정밀하게 분석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아주경제= 김선환·김선국·권영은 기자 shkim@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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