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삼국지 기행14-쓰촨성편> 4-1 천하삼분의 서막이 열린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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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2-02-06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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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삼분지계가 펼쳐진 부락산 

촉한사영(蜀漢四英:제갈량, 장완, 비위, 동윤)의 상.

(아주경제 이낙규 기자) 천하삼분의 서막이 열린 부락산(富樂山). 서기 188년 큰 뜻을 품고 관우, 장비와 함께 의형제의 연을 맺은 유비는 26년이 지난 서기 214년 형주에 이어 익주를 취함으로서 촉 건국의 기반을 잡기 시작한다. 제갈량을 만나기 이전까지 한낮 떠돌이 부랑배 신세에 지나지 않았던 유비에게 서촉행의 시발점이 된 부락산에는 천하를 다투던 주인공들의 희노애락이 고스란이 스며있는 듯 하다. 온 산을 쩡쩡 울리는 영웅호걸들의 고함소리와 비운의 운명을 맞이하고 역사속에서 사라져 간 인물들, 대의명분을 앞세운 책사들의 불꽃튀는 머리싸움, 계략과 배신 그리고 음모가 서려 있는 듯 왠지 모를 긴장감마저 느껴진다.

‘촉의 하늘’에선 소문대로 햇볕을 보기가 쉽지않았다. 희뿌연 시야를 뚫고 면양 시내 북쪽에 있는 부강을 건너자마자 우회전하니 도원결의를 형상화한 거대한 유비, 관우, 장비의 동상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부락산 공원에 다가온 것이다.

◆천하삼분의 서막이 열린 곳

본지 ‘걸어서 삼국지 기행’ 취재팀은 유비와 촉의 자취를 쫓아 쓰촨성 면양(綿陽)의 부락산을 찾았다. 안내원은 부락산이 천하삼분의 계책이 나온 곳이며 유비가 촉에 첫발을 디딘 곳이라고 설명했다. “부락산은 면양의 제일산이라고도 하는데 원래 부락산의 이름은 동산(東山)이었지요. 후한 헌제 건안 16년, 서기 211년에 익주목으로 있던 유장과 유비의 만남이 바로 부락산에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동산은 당나라때 부락산으로 이름이 바뀐다. “풍성하구나, 오늘의 즐거움이여!(富哉樂乎)” 술을 마시던 유비는 산 아래 펼쳐진 촉 지방의 기름진 농토를 바라보며 탄성을 쏟아냈다. 유비가 익주를 탈취하고 소원을 이룬데 대해 당나라 때 이 고사를 기념하여 부락산이라고 개칭하고 부락사를 세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때부터 부락산으로 불려진다.

“장군이 폐업을 이루시려면 북쪽은 천시(天時)를 차지한 조조에게, 남쪽은 지리(地利)를 차지한 손권에게 각각 양보하고, 장군은 인화(人和)를 이루어 형주와 서천을 취해 정족지세를 이룬다면 뒤에 중원을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락산 공원에 들어서니 마치 지척에서 주군에게 `천하삼분`의 계책을 진언하는 제갈량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평일 정오가 지난 시간 때문인지 부락산 공원 입구 앞은 취재팀을 제외하고 인적이 드물다. 정문을 통해 발걸음을 옮기니 촉한사영(蜀漢四英:제갈량, 장완, 비위, 동윤)의 상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부락산 공원 입구 앞에서 본 도원결의 동상의 웅장함에 비하면 촉한사영의 상은 너무나 작고 다소곳하며 얌전하다. 하지만 촉의 국가적 기틀을 마련한 제갈량과 제갈량이 떠난후 위기에 빠진 촉을 흔들림 없이 이끌어온 장완, 비위, 동윤의 모습에서 군사만이 갖을 수 있는 특유의 기품과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촉한사영의 상을 지나자 빛바랜 연잎이 드넓게 눈 앞에서 펼쳐진다. 무성하게 자란 연잎 사이 봉긋 솓아나온듯한 정자가 운치 있다. 옥경호(玉鏡湖)라고 불리는 연못위는 수면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연잎으로 뒤덮여 있었다. 연못 위를 지나는 아치형 다리를 건너자 갑가지 몸이 움찔해진다. 부락산 공원의 가장 큰 볼거리인 촉나라의 오호상장(五虎上將:관우, 장비, 조자룡, 마초, 횡충) 기마상이 당장이라도 달려나와 긴 창을 휘두를 것처럼 위압적인 자태를 뽐내고 서 있다. 웅장하고 장쾌한 모습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기마상 말 엉덩이의 꼬리가 짧게 묶여져있는 것은 긴 창을 휘두르다 자칫 말을 다치게 할수 있어 꼬리를 잘랐기 때문입니다.” 오호상장 기마상을 뒤로 하고 돌계단을 올라가다가 짧은 말꼬리가 이상하다 싶어 물었더니 안내원이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촉을 차지 하기 위한 계책을 논하는 유비와 방통의 주조상.

◆영웅의 고뇌가 깃든 면양 부락산.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 부성회관이라는 편액이 걸린 2층으로 된 큰 건물에 들어서니 유장이 유비를 극진히 맞이했던 홍문회를 본 따 ‘부성의 회’를 재현한 동상들이 늘어서 있다. 유비와 유장이 잔을 들고 있는 모습 옆으로 검을 숨기고 있는 위연과 신호를 기다리는 유비의 군사들이 사뭇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익주목 유장 막하의 장송은 난세에 익주를 다스리기엔 너무나도 나약한 유장의 모습에 한탄했다고 합니다. 촉땅의 미래를 근심한 장송은 결국 마땅한 인물을 찾아 나섰지만 작은 키에 벗겨진 이마, 들창코에 뻐드렁니인 초라한 외모 탓에 조조에게 푸대접을 받았지요 ” 안내원은 이렇게 말하고 유비군의 위연이 유장을 죽이려던 음모 ‘부성의 회’로 얘기를 이어나갔다.

장송은 조조에게 퇴짜를 맞고 돌아오는 길에 유비를 만나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 장송은 대번에 유비의 됨됨이를 알아보았다. 사람에 도취한 장송은 보물과 같은 사천지리도(四川地利圖)와 서천(익주)을 취할 방도까지 알려준다. 또한 한중 장로(張魯)의 세력이 서천을 넘보지 목하도록 유비의 도움을 받자고 유장을 설득하여 유비가 서촉에 주둔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 장송과의 만남이 이루어진 뒤 유비는 망설인다. 종친인 유장을 치는 것은 여태껏 인의를 중시한 자신의 전략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취재팀이 찾은 이곳 부석산은 촉의 거점이자 유비의 고장과 같은 곳이다. 인정에 이끌리는 천하영웅 유비의 유약함과 우유부단함, 그리고 끝내는 인간의 탐심을 어쩌지 못하는 인간적 한계, 이런 캐릭터가 집중 조명됐던 곳도 바로 이곳이다. 유비의 인간적인 고뇌와 책사들의 진언이 서슬퍼렇게 되살아나 온몸으로 전해지는 듯했다.

부성회관 아래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자 문 위로 공연무대가 있다. 12m쯤 떨어진 맞은편에 촉한이시(蜀漢伊始)라는 편액이 걸린 큰 건물이 있었다. 이곳에서 유비와 유장(劉璋)이 100일간 잔치를 벌이며 건너편 무대에서 벌이는 무희들의 춤을 바라보면서 술잔을 기울였다고 한다.

부성회관을 지나 오른쪽으로 난 길을 내려오다 보면 유비에게 계책을 말하는 방통의 주조상을 만나게 된다. 은밀한 계책을 전하는 분위기를 연상케 하듯 주조상은 눈에 띄지 않는 외진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유비와 방통의 주조상을 바라보니 종친을 공격할 것을 놓고 방통이 열심히 간언하고 이를 듣는 유비는 어찌할바를 몰라 망설이는 표정이 역력하다.

“주공 말씀이 천리에 맞사오나 지당한 이치만 내세우다가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습니다. 오늘 우리가 차지하지 못하면 결국 남이 차지하게 될 뿐입니다.”

방통의 말에 흔들렸을까? 아니면 큰 깨달음을 얻었을까? 결국 유비는 제갈량, 관우, 장비, 조운을 형주에 남겨놓고 5만 대군을 거느리고 장정에 오른다. 유장은 서촉(서천, 익주)을 차지하려고 온 것도 모른 채 충신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유비를 몸소 영접하고 유비 일행을 극진히 대접한다.

"유장은 평범한 군주로 묘사되고 있지만, 사실 유장은 인망이 두터운 온후한 군주였습니다." 안내원이 설명한다.

익주목 유언의 아들로 부친의 지위를 이어 받아 비록 장송의 유혹에 의하여 유비를 익주에 불러들이지만 나중에 장송이 유비에게 서촉을 넘겨주려는 사실을 알아채고 유비와 대립하게 된다. 서기 214년 유비에 의하여 성도가 포위되자 마침내 성문을 열고 항복하고 만다.

"유비가 성도를 포위했지만 성 안에는 3만 명의 정예와 1년분의 식량이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관민들은 목숨을 걸고 싸울 생각이었지만 유장이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고 싶지 않다며 항복을 결심했을 때는 눈물을 흘리지 않은 신하가 한사람도 없었다고 기록될 정도로 인망이 두터웠지요" 안내원 설명뒤에 마치 안됐다는 듯 씁쓸한 미소가 비춰진다.

언제나 승자의 입장에서만 기록되는 역사는 승자의 이야기만 과대 포장되기 마련이고 패자는 우둔하며 사악한 부류로 기록되기 마련이다. 힘에 논리에 의하여 승자만이 역사가 되고 패자는 역사속에서 잊혀져 가는 것이다. 

유비와 유장이 잔을 들고 있는 모습 옆으로 검을 숨기고 있는 위연과 신호를 기다리는 유비의 군사들이 사뭇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 부성의 회-탐욕에 번득이는 위험한 검무

방통은 도부수를 매복시켜 유장을 죽이면 힘들이지 않고 서천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권하지만 유비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비록 신의를 깨고 익주에 입성한 그이지만 이튿날 성중에서는 또 다시 잔치가 벌어져 유장과 유비가 자리를 같이 한다. 긴 술자리가 이어지고 취흥이 감돌 때 방통은 위연으로 하여금 검무를 추다가 유장을 죽이라고 명한다. 위연이 칼춤을 추자 유장의 종사 장임이 이를 눈치 채고 칼춤 상대를 자청한다. 이런 모습을 본 유비가 호통을 쳐 당장 칼춤을 중단시킨다.

“이렇게 형제가 만나서 즐겁게 마시는데 의심할 만한 일은 조금도 없어야 하느니. 홍문의 연회도 아닌데 어찌하여 칼춤을 추는 것이냐? 칼을 내려놓지 않는 자는 당장 목을 치겠다.”

그 뒤로도 유비는 100일동안이나 날마다 유장과 더불어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었다. 유비의 신의도 결국은 나라를 세운다는 대의명분앞에 무릎을 끓을수 밖에 없었다.

유비는 서두르지 않았다. 긴 시간을 기다리며 익주 백성들의 민의를 살피는데 노력했다. 때를 기다리며 자신의 탐욕을 제어했다. 그리고 마침내 때가 왔다. 서기 211년 조조가 손권을 공격하자 손권이 유비에게 구원 요청한 것이다. 유비는 유장에게 병사와 군수물자를 요청했지만 유장이 보내 준 양은 유비가 요청했던 것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유비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서촉을 차지하기 위한 기회를 기다리고 있있던 유비에게 유장의 볼품없는 지원은 그럴싸한 명분을 제공한 것이다. 이로써 유비와 유장의 협력관계가 깨어졌고 유비는 서촉의 여러 성을 점령하기 시작한다.

부락산은 천하를 꿈꾸던 유비에게 기회의 땅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트레이드마크와 같은 ‘신의’를 저버리고 종친을 배신한 욕망의 땅이기도 한 곳이다. 비록 속전속결로 서천을 차지하자는 방통의 제안을 따르지 않고 백성들의 신임을 얻어가며 차분히 서천을 도모하려 했다 해도 결국 종친을 향해 칼을 들이댄 그의 모습에서 인간세상의 권력욕과 부귀영화가 얼마나 덧없고 무상한 것인지 새삼 느껴진다.

몐양일대에는 많은 삼국지 유적들이 2008년 쓰촨성 대지진여파로 아직 보수공사중이었다. 우리 취재팀은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부락산 공원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공원밖을 나서자 처음 취재팀이 보았던 도원결의를 상징하는 유비, 관우, 장비의 상이 웅장한 모습으로 다시금 다가온다. 떠돌이 유비에게 촉한 건국의 보금자리였던 이곳에 유비, 관우, 장비 삼형제는 술잔을 맞대고 예를 취하며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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