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지금 나의 작품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정강자의 ‘무체전(無體展)’에는 형체는 없지만, 뒷걸음칠 수밖에 없는 숨 막히는 긴장이 있다. 사방형 공간의 모서리에서 스멀스멀 나오는 새하얀 연기, 새빨간 사이렌, '여러분은 지금 나의 작품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란 무심한 목소리는 1970년대 폐쇄적인 한국 사회로 관객을 끌고 간다. 손에 잡히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권위주의 통제처럼, 자꾸만 밀고 들어오는 새하얀 연기는 아무리 뒷걸음질 쳐도 무릎까지 차오르며 잠식한다.
리움미술관은 1970년 국립공보관에서 열린 정강자의 첫 개인전에서 선보인 '무체전'을 되살렸다. 당시 전위예술을 정치 선동으로 간주했던 정권은 전시 개막 사흘 만에 작가와 협의도 없이 이 작품을 강제 철거했다. 작가가 이미 고인이 된 상황에서, 리움은 과거 기사와 작가 노트, 유족 증언 등을 토대로 원형을 복원하는 데 공을 들였다.
리움미술관은 오는 5월 5일부터 기획전 '다른 공간 안으로: 여성 작가들의 공감각적 환경 1956~1976'을 선보인다고 29일 밝혔다.
2023년 뮌헨 하우스 데어 쿤스트에서 기획된 이 전시는 로마와 홍콩을 거쳐 리움미술관으로 오면서 확장됐다. 작품들은 미술사에서 오랫동안 누락되어 온 여성 작가들의 선구적 환경 작업을 재조명하고, 복원한 것들이다. '체험형' 혹은 '몰입형' 전시의 원조격인 작업들로, 관람자는 작품 안으로 직접 들어가 온몸으로 빛, 소리, 색, 공기, 움직임을 경험할 수 있다.
김성원 부관장은 이날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환경 작업은 특성상 작품이 폐기되기에, 작업들이 물질적으로 남아 있지 않다"라며 "당시 사라진 작업들을 마리나 푸글리에세 밀라노 MUDEC 관장과 안드레아 리소니 뮌헨 하우스 데어 쿤스트 예술감독 두 큐레이터가 3년에 걸친 연구 끝에 하나하나 복원해 냈다"고 말했다.
야마자키 츠루코의 '빨강'에서부터 주디 시카고, 리지아 클라크, 라우라 그리시, 레아 루블린 등 50년 전의 환경 작품을 실물 크기로 재구성했다.
마리나 푸글리에세 관장은 "처음에는 작가들이 활동하던 당시의 잡지 기사를 보고, 그 다음에는 환경작업이 제작된 기관을 방문해서 사진이 남았는지 확인했다"며 "작고한 작가의 경우 인터뷰 자료 등이 남았는지를 찾아봤다"고 말했다.
이어 "여성 작가들은 과거 본인이 원하는 바를 완벽하게 표현하는 게 힘들었다. 갤러리가 돈을 많이 투자하지도 않았고 판매도 이뤄지지도 않았다"며 "생존작가들의 경우 당시 작가가 구상은 했지만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던 것들을 구현하는 데, 작고한 작가들의 경우 자세하게 재현하는 데 집중했다"고 덧붙였다.
정강자의 '무체전'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미술관 측은 1956년부터 1976년 사이에 환경 작업을 선보인 한국 여성 작가를 찾느라 골머리를 앓았다. 공예, 건축 등 여러 분야를 샅샅이 조사한 끝에 무체전을 찾아냈다.
복원 역시 쉽지 않았다. 자료가 제한적인 데다가 작가는 이미 고인이다. 과거 전시를 다룬 기사와 작가 노트, 현장 사진 등을 면밀히 검토하고, 유족과 지인을 만나는 등 다각도의 고증 작업을 거쳐 작품의 원형에 접근했다.
김 부관장은 "도면이나 정확한 치수, 설명, 지침 모두 없었다"며 "'여러분은 지금 나의 작품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는 소리는 작가의 육성이었는데 테이프가 남지 않았다. 작가의 육성을 바탕으로 AI로 목소리를 살려냈다"고 말했다.
안드레아 리소니 예술감독은 "지금까지의 여러 버전 가운데 리움에서 선보인 이번 버전이 가장 자랑스럽다"며 "56~76년이란 저희가 설정한 시대를 명학하게 보여줄 뿐만 아니라 동일한 기준으로 저희들이 들여다보지 못한 작업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자랑스럽다"고 거듭 밝혔다.
김 부관장은 "이번 기획전은 현대미술사 흐름에서 형식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여성 작가를 조명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고 평했다.
"여성 작가를 다루는 전시는 함정에 빠지기 쉬워요. 사회·문화적, 심리학적 이론에 묻혀서 예술 자체를 보기 어렵죠. 두 기획자는 전문적으로, 또 우아하고 세련되게 핵심을 짚었어요. 어린아이들도 현대미술이 무엇인지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을 정도죠. 전문적이며 미술사적 가치가 있고 그러면서도 대중적이에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전시라고 할까요."
전시는 서울 용산구 리움미술관에서 5월 5일부터 11월 29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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