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희스타힐스

<새만금 토론회> 새만금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입력 2013-11-27 17:17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새만금 방조제. [사진제공 = 새만금개발청]

아주경제 권경렬 기자 = 향후 동북아 경제중심지로 조성되는 새만금 개발사업은 국토교통부·농림축산식품부·문화체육관광부·환경부·산업자원통상부·미래창조과학부 등 6개 정부 부처와 전라북도가 분산 추진해 왔다. 

앞으로 모든 개발사업의 계획수립·사업관리는 지난 9월 출범한 새만금개발청이 전담하게 된다. 농업용지 등 조성과 새만금지역 수질개선 대책은 농식품부·환경부가 맡는다.

식량난 해결을 위해 박정희 정권 당시부터 꾸준히 검토돼 온 새만금 개발사업이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1987년 대선이다.

당시 노태우 민정당 대선후보는 군산지역 선거 유세에서 새만금사업을 공약으로 발표했다. 대통령 당선 이후 새만금사업은 '대통령 공약 코드넘버 20-07-29'로 관리되기 시작했다. 이후 1991년 걸프전 파병을 놓고 노 대통령과 당시 김대중 신민당 총재 간의 '빅딜'이 성사되면서 같은해 11월 28일 방조제가 착공됐다.

1991년 11월 28일, 새만금종합개발사업 기공식. [사진제공 = 새만금위원회]

그러나 추진 과정에서 많은 부침도 겪었다.

1996년 시화호 오염사건이 터지자 환경단체들은 "새만금도 시화호처럼 오염될 것"이라며 강력 반발했다. 이어 1998년 김대중 정부 당시 감사원은 "오염대책과 토지 이용계획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감사 결과를 내놓았다. 민관 공동조사단이 2001년 5월 "환경을 고려해 공사한다면 문제 없다"는 결과를 발표하면서 중단됐던 방조제 공사가 재개됐다.

그러나 조사단 결정이 발표된 지 3개월 뒤에 환경단체 등이 '공유수면 매립면허·사업시행인가 처분 취소소송(일명 새만금 소송)'을 제기하고 공사집행정지를 신청했다. 한 달 뒤쯤 서울행정법원은 방조제공사 중지결정을 내렸다. 당시 새만금 방조제는 33.9㎞ 중 2.7㎞만 남은 상태였다. 

정부의 불복과 시민단체의 항소 등으로 이어지던 소송은 2006년 3월 16일 대법원이 정부 승소 확정 판결을 내리면서 일단락됐다. 같은해 4월 21일 방조제 끝물막이 공사가 완료됐다. 1991년 첫 삽을 뜬 이래 14년 5개월 만이었다. 이어 후속 공사가 이어져 2010년 4월 27일 마침내 새만금 방조제가 준공됐다. 총 19년이 걸린 셈이다.

2006년 4월 21일, 새만금 끝물막이 공사 모습. [사진제공 = 새만금위원회]

이후 새만금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큰 변화를 겪었다. 1989년 만해도 새만금사업의 기본계획은 토지개발 면적의 전체를 농지로 개발하려고 했다. 그러나 2011년 3월 새만금 종합개발계획에서 농업용지 30%, 산업·관광 등의 용지를 70%로 확정지었다. 식량난 해결을 위해 추진된 사업이 시대적 변화에 따라 '동북아 경제중심지'로 탈바꿈한 것이다.

정부가 2011년 발표한 새만금종합개발계획은 새만금 개발의 밑그림을 완성한 것으로 향후 창조적 명품 녹색·수변도시로 조성하는 다양한 방안을 제시했다.

계획에 따르면 새만금은 △명품 복합도시 △신재생에너지 메카 △생태·환경용지 △첨단 고품질 수출농업 육성 △과학·연구용지 △신시~야미 메가리조트 등을 갖춘 창조적 녹색·수변 도시로 조성될 예정이다.

새만금방조제 신시관문. [사진제공 = 새만금개발청]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