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시대 핵심100인]<1>시진핑-②2007년 상하이에서 승천하다


(베이징 = 조용성 특파원) 시진핑(習近平) 부주석은 전인대 부위원장을 지낸 시중쉰(習仲勛 : 1913~2002)의 장남으로 1953년 산시(陝西)성 푸핑(富平)에서 태어났다. 당시 시중쉰은 저우언라이 총리의 최측근으로 중앙정무원 비서장이었다. 시진핑이 6세였을 때 시중쉰은 국무원 부총리에 오르는 등 탄탄대로를 걸었다.

그러던 시중쉰은 1962년 마오쩌둥(毛澤東)에 의해 반혁명분자로 몰리면서 나락으로 떨어진다. 문제는 엉뚱하게도 류즈단(劉志丹)의 생애를 그린 한 소설이 불러왔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100대 영웅 중의 한 사람으로 추앙되는 류즈단은 시중쉰과 함께 ‘산간혁명의 근거지’인 시베이(西北) 홍군 및 시베이 혁명근거지의 창건자로 활약이 대단했다. 이 소설이 ‘산간혁명이 중앙 홍군을 구했듯, 산간출신이 마오쩌둥의 실책을 구할 것이다’는 암시로 해석되면서 시중쉰이 반동으로 몰린 것. 이후 시중쉰은 8년동안 수감됐으며, 석방 이후 8년동안 문화대혁병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하방생활을 한다.

◆최상류층에서 인간지옥으로

최상류층의 유복한 생활을 해오던 시진핑은 아버지의 몰락으로 기약없는 고난의 길을 걷게 된다. 부친의 숙청 후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66년 문화대혁명이 터졌다. 그는 지식분자로 분류되며 거친 사상비판을 받게 되고 결국 13세때 농촌으로 하방당한다.

베이징의 왕자에서 반역자의 아들로, 그리고 농민으로 신분이 급전직하하는 과정에서 그는 정치의 비정함과 인간의 냉혹함을 맛봤다. 시진핑은 농촌에서 7년을 보낸다.

당시 그는 다섯가지 고초(五關)을 거쳤다고 회고하고 있다. 첫번째는 벼룩이었다. 잠자리에 누우면 벼룩이 물어대서 잠을 잘수 없었고, 벼룩에 물린 자리는 벌겋게 부어올랐다가 나중에는 수포로 발전했으며, 떨쳐낼수 없는 가려움에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마저 들었다고 한다. 두번째는 음식이었다. 굵고 거친 잡곡밥이 처음에는 목에 넘어가질 않았지만, 이마저도 먹지 않으면 배를 굶기 때문에 먹을 수 밖에 없었다. 하방당한 입장에서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불가능이었다. 한번은 어렵사리 배급받은 돼지고기를 날것으로 입에 넣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소스라쳤다고 한다. 세번째는 생활이었다. 스스로 양말이나 이불을 짰으며, 옷을 만들어 입었다고 한다. 네번째는 노동이었다. 일을 하러 산에 오르면 숨이 차오르고 무거운 짐을 못이겨 넘어지기가 일쑤였다. 다섯번째는 사상이었다. 고된 농민생활에 과거 화려했던 생활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려 밤을 지새기가 일쑤였다고 했다. 하지만 2년여 후 시진핑은 모든 것을 적응해 내 완벽한 농민의 삶에 체화된 사람으로 변했다.

그는 “7년동안 얻은 성과 중 첫번째는 현실이 무엇인지, 실사구시가 무엇인지, 대중이 무엇인지를 알았다는 것이며, 두번째는 나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배양했다는 것이다”고 말한다.

◆스스로 고난의 길을 택하다

1975년 베이징으로 돌아온 시진핑은 칭화(靑華)대학 공정화학과를 졸업한 뒤 1979년 국무원 판공청에서 겅뱌오(耿彪) 부총리의 비서로 배치됐다. 겅뱌오는 당시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이자 국무원 부총리로 중앙군사위원회 비서장까지 겸하고 있었다. 부친 덕분에 모든 학생들이 선망하던 위치로 배치를 잘 받은 셈.

그러던 그는 1982년에 돌연 농촌의 지방관리를 지원했다. 겅뱌오는 “농촌으로 가려거든 차라리 야전부대를 가라”고 조언했지만 그는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시진핑은 “당시 많은 친구들이 나의 결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모두 만류했다. 당시 주동적으로 베이징에서 농촌으로 가려는 사람은 류위안(劉源, 류샤오치(劉少奇)의 아들)과 나밖에 없었다”고 회고한다.

그는 29세에 허베이(河北)성 정딩(正定)현 부서기에 임명됐다. 정딩현에서 그는 남루한 군복을 입고, 농촌간부들과 마찬가지로 자전거를 탔으며, 직원식당에서 똑 같은 음식을 먹었다.

이후 1985년 푸젠(福建)성 샤먼(廈門)시의 부시장으로 옮겨갔으며, 1988년 35세이던 해 그는 빈곤지역인 푸젠성 닝더(寧德)의 서기로 옮겨갔다. 당시 관료들이 좋은 위치에 사택을 마련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시진핑이 조사해보니 1982년 이래로 7392명의 간부가 부정한 방법으로 사저를 지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부패척결을 다짐했다. “이 지역 모든 간부들과 척을 질 셈이냐”는 항의에 시진핑은 도리어 “기만명의 인민들과 척을 지느니 기백명과 척을 지고 말겠다”고 일축했다. 인민일보는 이 사건을 보도했으며 시진핑은 이름을 날렸다.

그는 1985년부터 무려 18년간 푸젠성에서 일했다. 이 시절 대만 자본을 많이 끌어들여 푸젠성의 부를 크게 올려놨다. 그가 저장(浙江)성 서기로 부임해가던 2002년 푸젠성의 당시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전국 최고수준인 3000달러까지 치솟았다.

◆상하이서 전국적인 스타등극

시진핑이 저장성서기이던 2006년 9월 천량위(陳良宇) 당시 상하이(上海) 서기가 비리 혐의로 낙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상하이방 일원이었던 천량위의 개인적 비리사건으로 종결됐지만, 후임자 선정과정이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의 공청단파와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의 상하이방간의 파워게임 양상으로 번져가며 전국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상하이 서기는 20년동안 상하이방인 상하이시 간부가 승진임명돼 왔다. 하지만 부패척결을 내세운 후 주석은 공청단 인사를 임명하려 했고, 장 전 주석은 자존심을 걸고 이를 저지해야 했다. 후임인사가 난항을 겪으며 상하이성 서기는 6개월간 공석으로 남겨졌다. 당시 최종 후보는 공청단파인 류옌둥(劉延東) 국무위원, 장쩌민 전 주석과 가까운 장가오리(張高麗) 텐진(天津)시 서기, 그리고 시진핑이었다.

이런 배경하에 상하이방도, 공청단도 아니면서 양 진영으로부터 호감을 받고 있던 시진핑이 상하이시 서기로 발탁된다. 후 주석으로서는 상하이방이 아닌 인물을 상하이서기로 임명했으며, 장 전 주석으로서는 공청단의 상하이입성을 저지했다는 데서 양측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 당시 공산당 중앙조직부장이던 허궈창(賀國强) 역시 특별히 “이번 인사는 상하이 한곳의 시야가 아닌 전국적인 시야에서 이뤄졌다”고 강조했었다. 게다가 시진핑은 최고위층 부패스캔들을 처리할 만한 청렴성을 갖추고 있었다. 이는 중국 정가에서 이변으로 받아들여졌고, 중국인들의 시진핑에 대한 관심도는 급상승했다.

2007년 3월 상하이시 관료들은 상하이에 막 부임해온 시진핑을 위해 영국식 3층짜리 화려한 양옥을 사택으로 준비했다. 시진핑은 호화주택으로 들어가 급히 한번 둘러본 후 “원로들의 요양원으로 하면 더 적합하겠다”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곧바로 떠나버렸다.

취임한지 얼마 안돼 저장성으로의 출장길에 상하이시 관리들은 항저우(杭州)까지 직행으로 가는 전용열차를 준비했지만, 시진핑은 아무 말 없이 7인승 미니버스로 바꿔타고 항저우로 향했다.

또한 시진핑은 다년간 상하이에서 장사를 하고 있던 친지들을 다른 도시로 떠나도록 했다. 그는 이렇듯 현지 관료들에게 모범을 보이며 천량위사건으로 빚어진 혼란을 신속히 안정시켰다.

시진핑이 상하이시 서기로 부임한 후 첫 공개활동이었던 그해 5월 중국공산당 상하이시 9차대표대회에서 그는 “천량위 사건은 현행 사회보장기금제도의 모순과 엄격하지 못한 집행상의 문제를 드러냈다”며 사태의 일단락을 고하고는 “상하이는 중국 중앙정부의 정책과 전국적인 발전계획에 보조를 맞춰 발전해 나가야 한다”며 중앙정부와의 화합을 강조했다. 정치학자들은 이날의 발언을 두고 “시진핑이 장쩌민 등 원로그룹을 보호하면서 동시에 후진타오 주석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지혜를 발휘했다”고 평했다.

그동안 중앙정부와 보조를 맞추지 않고 독자적인 노선을 걸어왔었던 상하이였기에 후진타오는 이같은 목소리에 기뻐했다. 인민일보는 7월 ‘상하이에서 나온 새로운 목소리를 환영한다’라는 제목의 사설을 싣고 시진핑의 노선을 높이 평가했다. 



◆리커창을 꺾고 1인자 등극

2007년 10월 당 대회가 열리기 이전 오랫동안 시진핑은 차기지도자 후보로 거론이 되기는 했지만 리커창(李克强) 부총리의 그늘에 가려 있었다. 후 주석은 자신이 총애하는 리커창(李克强)부총리를 후계자로 만들려 했고 언론은 연일 리커창을 집중조명했다. 하지만 시진핑이 상하이 서기로 임명되면서 그의 정치적 자질과 잠재역량이 부각됐고 6개월동안 상하이에서 보여준 행적들은 중국인민들에게 신뢰감을 심어주었다.

2007년 6월 후 주석은 400명의 고위직 인사들을 대상으로 차기지도자 선호도를 묻는 투표를 했다. 리커창을 차기지도자로 올리기 위한 수순으로 읽혀졌다. 하지만 이 선거에서 1위를 차지한 것은 리커창이 아니라 시진핑이었다. 후 주석으로서는 의외의 결과였다. 리커창은 너무 일찍 부각됐으며, 공청단파의 득세에 대한 견제심리가 퍼져 있었고, 리커창의 업적이 그렇게 빼어나지 못했다는 게 원인으로 분석됐다.

후진타오 주석은 이는 인기투표에 불과하다며 의미를 축소시키려 했지만, 장쩌민과 쩡칭홍 등 원로그룹들은 선호도투표를 리커창의 차기등극을 저지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로 사용했다. 상하이방과 태자당은 리커창의 대항마로 시진핑을 적극 천거했고, 장쩌민과 쩡칭홍(曾慶紅) 전 부주석은 물밑에서 시진핑을 지원했다. 후진타오는 어쩔 수 없이 리커창을 후계로 만들려던 자신의 구상을 포기해야 했다. 대신 그는 정치적 타협을 통해 공청단파를 대거 정치국위원에 입성시키고, 자신의 ‘과학발전관’을 공산당 당규에 포함시키는 이득을 얻었다. 그리고 결국 시진핑은 그해 10월 중앙위원회에서 리커창보다 한단계 위인 공산당 서열 6위에 낙점되고, 사실상 차기 국가주석을 예약했다.

2008년 3월 전인대가 끝나고 시진핑은 국가부주석의 집무실인 베이징 중난하이(中南海) 난수팡(南書房)을 찾았다. 난수팡의 전 주인이었던 쩡칭홍은 다른 사무실로 옮겨가면서 시진핑에게 “진핑, 내 사무실을 네게 넘겨준다. 이 사무실은 후 주석이 부주석 시절 사용했으며, 20년 전 당신의 아버지의 집무실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시진핑은 쩡칭홍으로부터 국가부주석직은 물론 중앙당교 교장직과 홍콩마카오협조사무조장도 넘겨받았다. 이후 그는 차기지도자로서 나아감과 물러남에 절도가 있고 돌출사태에도 침착함을 유지하며 착실히 후계자의 길을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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