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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경의 트렌드브리핑> 미국 드라마를 보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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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0-12-10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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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드라마의 짜임새는 차원이 다르다. 억지는커녕 서툰 연기도 없다. 눈물샘을 쥐어짜지 않으며 공분을 일으키지도 않는다. 탄탄한 스토리텔링에 담백한 대사, 살짝 치켜뜨는 눈빛과 계산된 제스처가 시청자의 상상력을 무한 자극한다. 한번 맛들이면 푹 빠지지 않을 수 없다.

'X-파일’이나‘CSI 과학수사대’,‘위기의 주부들’‘프렌드’‘그레이 아나토미’등이 매니아들의 애장품이라면 ‘24시'나 ‘번 노티스’‘멘탈리스트’등은 50대 고학력 전문가들도 밤을 새우게 만든 핫 아이템들이다. 매니아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은 캐나다 드라마‘리제네레이션’은 북미 지역 일대를 무대로 활동하는‘전염병 수사대’의 활약상을 보여주는데 신종플루 시즌에 더욱 실감나는 아이템이다.
 
이 중에서도 요즘 케이블 TV나 인터넷 프로토콜(IP) TV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리제네리이션’과 ‘24시’등은 공통된 설정이 있다. 다름아닌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예측 불가능한 혼돈이다.

'리제네레이션’은 자연발생적인 전염병의 창궐과 생물학적, 화학적 테러로 인한 공포스런 혼돈을, ‘24시’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나 러시아 마피아, 중국 삼합회 등이 핵물질 등을 훔쳐 팔아 먹으려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정치지도자 암살과 테러 등으로 인한 사회적 혼돈을 다룬다.
 
혼돈을 조장하는 개인, 집단, 세력은 모두 특정한 종교나 이념 편향성을 지녔거나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권력욕의 화신들이다. 그들은 대개 자기들끼리만 어울려 다니는 게 아니라 수사 담당 부서는 물론이고 심지어 백악관 같은 곳의 핵심 요직에도 침투해 범죄와 수사를 둘 다 양 손에 쥐고 진두지휘하기까지 한다.

정보 조작과 수사 방해,적과의 내통, 언론 플레이와 민심 공작, 최고 지도자의 총기 흐리기와 의사결정 왜곡, 거짓 정보 전달과 가짜 명령 등은 기본이다. 최악의 경우 수사본부 내의 서버를 폭파하거나 핵심 요원들에게 총격을 가하고 최고 지도자를 납치, 암살하기도 한다.
 
도대체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분간할 수 없는 혼란 속에 죽고 죽이며 희비가 엇갈리고 정의와 불의가 뒤섞인다. 범죄를 쫒는 연방 요원마저 “무엇이 옳은 지 모르겠다”며 범죄 혐의자의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전염병 예방 백신을 개발하기 위해 일부러 전염병을 퍼뜨리는 미생물학자가 있는가 하면 정부에 의해 자행되는 환경오염을 경고 한다는 명목으로 강과 호수에 치명적인 생태 변이 물질을 흘려 넣는 환경운동가도 등장한다.
 
어느 정도 흥행을 위한 과장이 있겠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현실적 개연성이 없을 수 없다고 본다면 요즘처럼 이런 드라마들이 실감나는 시절도 없는 것 같다.
 
줄리안 어샌지라는 새파란 서른 아홉 살 젊은이가 세계의 주요 군사, 에너지, 물류 시설 정보와 미국 등 주요국의 외교 기밀을 웹사이트에 누설했고 에릭 캉토나라는 마흔 네 살 짜리도 ‘뱅크런(예금자들이 한꺼번에 예금인출을 시도하는 것) 캠페인’을 시도했다. 어샌지는 '언론 자유와 정보 독점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 캉토나는 대다수 서민을 위한 금융 시스템으로의 개혁을 위해서라고 한다. 캉토나의 시도는 피부에 와닿는 경제파탄의 우려 탓인지 예금자들의 동참을 끌어 내지 못했지만 어샌지는 영국 경찰에 신병확보가 된 상태에서도 추종자들이 여기 저기 등장해 ‘판도라의 상자’협박으로 사람들을 더욱 벌벌 떨게 하고 있다.
 
이제 세상은 어떻게 돌아갈 지 아무도 모른다. 캉토나의 뒤를 잇는 누군가가 일으킬 지 모를 뱅크런 도미노 사태가 터지거나 어샌지가 폭로한 시설 중 한 군데만 테러를 당해도 혼돈은 전 세계적으로 순식간에 확산될 것이다. 제2, 제3의 뱅크런과 테러도 가능하고 힘 있는 국가 기관의 대응은 사후약방문식일 게 뻔하다.
 
민심이 비빌 언덕이 없는 혼돈의 시대가 도래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 드라마들은 이미 그런 시대적 진실을 간파하여 뭔가 교훈을 남기고자 미리 제작된 것일까? 드라마의 주연, 조연, 단역 할 것 없이 혼돈을 기정사실로 인정하고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로 쿨하게 대응하는데, 우리 정서로서는 기가 질리는 장면들 투성이다.
 
잔정에 약하고 울분 잘 토하며 남 감싸기도 잘하고 앞날에 늘 행운이 따를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순진한 우리나라 국민의 정서에는 맞지 않다.
 
그래서 빌어본다. 모든 새로운 혼돈이 우리나라만은 비켜가기를... 미국 드라마는 그저 한낱 오락거리에 지나지 않기를...우리만 예외이기를...
 
[트렌드아카데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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