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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게티이미지뱅크]


전기차 한 대에는 수백 개의 전력반도체가 들어간다. 배터리에 저장된 전력을 모터에 맞는 형태로 바꾸는 것도, 주행 중 에너지 손실을 줄여 항속거리를 늘리는 것도 이 반도체 몫이다.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역시 마찬가지다. 서버 수만 대가 24시간 돌아가는 환경에서 전력 효율을 몇 퍼센트 높이느냐가 운영 비용을 좌우한다.

전력반도체는 전압과 전류를 변환·제어하는 부품이다. 직류를 교류로 바꾸거나 전압을 조절해 에너지 손실을 최소화한다. 가전과 산업기기에 오랫동안 쓰여온 부품이지만, 전기차와 AI 인프라가 확산되면서 위상이 달라지고 있다. 이제는 제품의 성능과 경쟁력을 직접 결정하는 핵심 소자로 거듭나고 있다.

관련 시장도 빠르게 커지고 있다. 일본 시장조사업체 후지경제그룹에 따르면 세계 전력반도체 시장은 2030년 5조 5143억엔(약 51조원) 규모로 2025년 대비 56% 성장할 전망이다. 적용 분야도 전기차·데이터센터를 넘어 재생에너지 설비, 철도, 산업기기까지 확대되고 있다. 소재 또한 기존 실리콘(Si)에서 탄화규소(SiC), 질화갈륨(GaN) 등 차세대 소재로 전환이 진행 중이다.

SiC는 실리콘 대비 전력 손실이 적고 고온·고전압 환경에서도 안정적으로 작동해, 전기차와 데이터센터 모두에서 사용이 빠르게 늘고 있다. 이에 따라 2035년 SiC 전력반도체 시장 규모는 2025년 대비 6배인 약 27조원에 이를 전망이다. SiC 개발 경쟁은 이미 세계 전력반도체 패권 경쟁의 핵심 축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전기차는 400V에서 800V로 고전압화되면서 고성능 전력반도체 수요가 더욱 커지고 있다.

시장 확대는 곧 경쟁 격화로 이어지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옴디아에 따르면 2024년 기준 독일의 인피니언 테크놀로지스가 세계 전력반도체 시장 점유율 17.4%로 선두를 달리고 있는 것을 비롯, 미국과 유럽 기업들이 기술력과 생산능력을 앞세워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여기에 중국 기업들의 부상은 기존 질서를 흔드는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단순한 저가 공세를 넘어 산업 구조 자체를 바꾸는 수준의 위협이다. BYD(세계 7위)는 차량용 반도체를 자체 설계·생산하는 수직계열화를 구축해 배터리부터 완성차까지 공급망을 통합했다. 화웨이는 데이터센터와 통신장비 기술을 기반으로 에너지 효율을 좌우하는 반도체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고, 샤오미까지 전기차용 반도체에 뛰어들었다. 완제품과 반도체를 묶는 '생태계 경쟁'이 본격화되는 양상이다.

문제는 독일과 중국 사이에서 낀 일본 기업들의 구조다. 일본은 전력반도체 분야에서 오랜 기술력을 축적해 왔고, 세계 상위 10위 업체 중 3곳을 보유하고 있을 만큼 존재감도 있다. 그러나 사업이 기업별로 분산돼 개별 규모가 작다는 한계가 뚜렷하다. 2024년 기준 일본 1위인 미쓰비시전기(세계 4위)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4%대에 불과하고 도시바와 롬은 각각 10위, 12위 수준이다.

인피니언 한 곳의 점유율(17%)이 일본 상위 3사를 합친 것보다 크다는 사실은 개별 기업 단위로는 규모의 경제를 확보하기 어렵다는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연구개발(R&D)과 설비투자를 각사가 따로 집행하다 보니 중복 투자가 불가피하고, 한정된 자원이 분산되는 악순환이 반복돼 왔다. 롬의 아즈마 가쓰미 사장은 "일본 업체들은 규모가 작아 힘을 합치지 않으면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기 어렵고 우수 인재의 해외 유출 위험도 커진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구조적 약점은 외부 환경 변화 속에서 빠르게 드러났다. 중국 기업들이 대규모 투자와 수직계열화를 앞세워 시장을 잠식하는 가운데 전기차 시장 성장세 둔화까지 겹치며 충격이 현실화됐다. 롬은 전기차 수요 부진의 직격탄을 맞아 2024 회계연도에 12년 만에 적자 전환했다. 수익 기반이 흔들리자 업계 내부에서는 재편 필요성이 빠르게 제기됐다.

일본 정부도 움직였다. 경제산업성은 2023년부터 보조금을 매개로 기업 간 협력과 재편을 유도해 왔다. 도시바-롬, 덴소-후지전기(세계 5위) 등 기존 협력 구도를 기반으로 통합을 추진했다. 하지만 이해관계와 주도권 갈등, 인력·설비 조정 부담이 겹치면서 논의는 교착 상태에 머물렀다.

이런 가운데 지난 2월 업계 판을 뒤흔드는 사건이 발생했다. 토요타자동차의 전장 부품업체 덴소가 롬에 약 1조 3000억 엔 규모의 인수 제안을 한 것이다. 롬은 장고 끝에 반격에 나섰다. 덴소의 제안은 별도로 검토하면서도 라이벌 관계였던 도시바, 미쓰비시전기와 전력반도체 사업 통합을 위한 협의에 들어간다고 전격 발표했다.

그러나 기술력은 있되 규모가 작은 일본 전력반도체 산업이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다. 중국 기업들이 보조금과 수직계열화를 앞세워 시장을 잠식하는 속도가 일본 기업들이 합의를 도출하는 속도보다 빠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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